늦깍이 신인 김훈, 대표 작가로 돌아오다

김훈의 또 다른 역량을 보여준 <개>

등록 2005.08.09 23:58수정 2005.08.10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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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훈의 장편소설 <개> 앞 표지

김훈의 장편소설 <개> 앞 표지 ⓒ 푸른숲

이순신과 우륵을 통해 더 이상 기자가 아닌 소설가임을 보여줬던 김훈. 그가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린 <개>로 돌아왔다. <개>는 '보리'라는 진돗개의 삶을 빌어 인간세상을 그리고 있는 의인화 소설인데 지은이의 다른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면 지은이가 '개'의 시선을 빌렸다는 것은 약간은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신앙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장인 정신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면서도 인간 세상의 잔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지은이였기에 '인간'이 아닌 '동물'을 택했다는 것에서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에서 '동물'의 시선을 빌렸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들 세상에서 한평생 살다가는 개이기에 이제껏 지은이가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외부의 시선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철없는 시절을 거치면서 든든한 수놈으로 성장할 때까지도 보리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진돗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이순신이나 우륵, 이사부에게서 기대했던 것을 작품들에서 기대한 만큼 확인할 수 있었듯이 <개>에서도 개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때려도 반항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주인을 호위할 줄 알며 시키지 않아도 먼저 제 할일을 하고야마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바로 보리다. 개의 장인 정신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까? 죽는 순간까지도, 설사 잡아먹히는 것일지라도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개의 모습들은 <개>에서 곧잘 등장하는데 이는 제 역할에 충실한 일종의 장인 정신으로 볼 수 있다.

개에 대한 좋고 나쁨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잣대로 갈려진다. 보리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상당히 버릇없는 개로 그려지는 '악돌이' 같은 경우도 일반적으로 보면 난폭한 '악'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작품 속 잣대로 보면 제 역할에 충실한 또 하나의 개가 된다. 반면에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개들은 어떠한가. 사람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그것들은 <개>에서 모두 '똥개'가 될 뿐이다.

다만 <개>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성을 그려내는 그 분위기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확연하게 눈에 띄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이제까지의 작품들은 칼날이 품고 있는 그 날카로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살벌함이 주를 이루었다면 <개>에서는 개의 온순하고 따뜻한 마음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과장해서 말하자면 동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그렇다면 인간세상의 잔인한 모습들은 어떠한가? <개>에서도 그것은 여전하다. 다만 농도가 약하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주인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충성을 바쳤건만 고작 자신들의 몸보신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터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비추어 장면을 묘사하는 지은이의 펜은 그렇게 날카롭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개가 죽을 때까지 인간에도 충성해야 한다고 믿고 있듯이 인간은 인간대로 개를 잡아먹어도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그저 믿음과 믿음이 부딪히는 정도로 나타날 따름이다.

그 외에도 인간세상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하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리의 눈을 빌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많다. 비록 그것이 어촌과 농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치우쳐 있다는 것이 아쉬움을 남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따스한 눈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 '냄새'로 표현되는 몸의 언어에 대한 믿음, 죽음이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슬픔에 묘사 등 <개>는 이제껏 지은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차가움' 대신에 '따뜻함'으로, '냉소' 대신에 '미소'로 대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차가운 것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예사 솜씨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차가운 것을 따스하게 그려낼 줄 아는 솜씨일 테다. <개>가 바로 그러한데 이것은 지은이가 소설가로서 노련함과 원숙미까지 갖추고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개>는 더 이상 지은이가 늦깎이 신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명실 공히 오늘날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푸른숲,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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