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며느리가 돼 주어서 고맙다"

결혼 예물 새로 장만해 주신 시부모님

등록 2005.08.15 14:18수정 2005.08.1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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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며느리인 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다른 어머님은 그러나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을 저에게 냉큼 건네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나이 서른 살인 큰아들의 결혼에만 신경을 쓰느라 큰아들에게는 많은 맞선을 주선했으면서도, 나이 스물여덟 살인 막내아들에게는 정작 맞선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시던 어머님이 1990년 6월 어느날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랍니다.


마침 적당한 맞선자리가 하나 나왔으니, 시간을 내어 서울에서 내려오라고요. 하지만 그때 막내아들은 이미 저를 만나서 3개월째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만나고 있는 아가씨가 있다"고 거절했답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뒤로 넘어질 듯 깜짝 놀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당신 아들에게 "지금 만나는 서울 아가씨와는 내 허락이 있기까지는 절대로 깊이 사귀면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답니다.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살아 온 상식에 의하면, 서울의 아가씨들은 자기 남편에게는 온갖 애교로 정신을 쏙 빼놓으면서 시댁 식구들에게는 나몰라하고,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옷이나 사 입고, 반찬도 해 먹을 줄 몰라서 모두 사 먹는다고 하더랍니다.

서울에 사는 아가씨와 잘못 결혼을 하면, 살림살이도 엉망이 되고 시댁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리라고 지레 짐작을 하신 어머니는 당신 아들에게 하루빨리 서울의 아가씨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오라고 했답니다.

경남 함안에 있는 집까지 오기 힘들거든 부산의 큰 딸 집으로 아가씨를 데리고 오면, 당신이 큰 딸 집으로 아가씨를 만나러 오겠다고도 했답니다.

어머님의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저에게 빠른 시일안에 주말을 이용하여 부산에 있는 큰 누나 집에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당시 그 남자를 따라서 인사를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겨우 그 남자를 만난지 3개월여. 아직 저의 마음속에는 그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제 스스로 결정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가족부터 만난다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저의 그런 마음을 이야기 했을 때, 남자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들의 그런 의사를 전해 들은 어머니는 한발자욱 물러서서 그러면 서울 아가씨의 사주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잘 아는 스님에게 두 사람의 궁합을 보았더니 아마도 아가씨의 몸 어딘가에,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곳에 커다란 흉터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 흉터가 있다면 당신 아들과 결혼을 해도 아주 잘 살거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는 다시 아들에게 만나는 아가씨의 몸 어딘가에 있다는 커다란 흉터 유무를 물어왔고,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 다쳐 생겨 난 오른쪽 무릎 밑의 커다란 흉터를 남자에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그해 8월 저는 여름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그 남자의 시골집으로 예비 시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갔습니다.

지금의 시댁은 8년전에 새로 신축하여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지만, 1990년 8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 쬐던 한낮에 도착한 예비 시댁의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 이채로웠습니다.

초록색 나무 대문 위로는 아치처럼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부엌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고, 마당을 가로 질러 가야 하는 화장실은 전형적인 시골 화장실로 출입문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봐야 할 경우에는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걸어 오는 발자욱 소리를 들으면 안에 있다는 표시로 '어흠'하는 헛기침을 하거나, 저 같은 경우에는 '안에 있어요'하고 약간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기척을 해야 했던 시골집이었습니다.

훗날 어머님께서 저에게 들려 주셨던 이야기는, 그때 당시 저의 모습이 당신이 생각했던 요망한 '서울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친정의 형제가 열두 명이라는 이야기에, 틀림없이 엄마가 두 명이나 세 명인, 아주 복잡한 집안의 아가씨일거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두 딸들에게도 아주 자신만만하게 '어디 두고봐라, 그 아가씨네 자식이 그렇게 많은 것은 절대로 엄마가 한명이 아닐 것이다'하고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1991년 1월, 저의 약혼식에서 친정 엄마께서 말씀 하신 '우리 열두 자식들 모두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렇게 잘 자라 준 것이 저는 행복하고 감사할 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큰 딸에게서 전해 듣고 나서야 어머님은 당신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임을 깨달았다고 저에게 몇번이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무튼 1991년 2월에 큰 아들을 결혼 시키고, 한달 후인 같은 해 3월에 막내 아들마저 결혼을 시키고나서, 어머님과 아버님은 부부동반해 두 번 저희 집을 다녀 가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손위 큰 시누이를 통해서 전해 들었지만, 그렇게 두 번 다녀 가실 때마다 어머님은 당신 나름대로 우리집 살림살이를 점검하셨다고 합니다. 이불장이며, 서랍장이며, 싱크대며, 냉장고 속을 열어 보면서 작은 며느리가 살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반찬은 사 먹지 않고 잘 만들어 먹는지를 심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후 "서울의 작은 올케는 살림을 잘 하고 있더냐"고 묻는 당신의 두 딸들에게 어머님은 "서울의 작은 며느리는 너희들 보다 살림을 몇배나 잘 하고 있더라, 그러니 너희들이나 잘 하고 살아라"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두 손위 시누이는 활짝 웃고는 했습니다.

결혼 2년후, 당신들의 바램대로 서울생활을 접고 창원으로 이사를 와 준 것에 어머님께서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며느리의 결혼식 예물을 장만하라고 준 300만 원에서 80만 원만 신랑 신부의 예물을 준비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에, 또 결혼 비용을 아끼고 아껴서 1000만 원의 목돈을 저축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신 아들의 월급이 50만 원을 겨우 넘는데도 적금을 두개나 넣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저의 손을 잡으며 "며늘아, 우리집 며느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님과 아버님은 빈약한 결혼예물을 하고 다니는 작은 며느리가 마음에 걸린다면서 당신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팔찌와 목걸이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팔찌는 필요하지 않다고 아예 장만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래도 결혼 예물인데 사는게 좋겠다는 주변 사람의 권유로 마련한 저의 석 돈짜리 팔찌가 큰 며느리의 팔찌보다 너무 가늘다며 열 돈짜리 팔찌를 사 주셨습니다.

결혼 후 시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팔찌
결혼 후 시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팔찌한명라
그리고 미혼시절부터 하고 다니는 18k 목걸이가 있다면서 목걸이는 아예 사지도 않았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버님의 비상금까지 털어서 저의 목걸이를 샀습니다. 그리고 주말에 시댁을 찾아 간 저를 우리 아이들도 모르게 작은 방으로 살짝 불러 저의 목에 직접 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시부모님께서 사 주신 저의 팔찌와 목걸이는 시댁의 다른 식구들은 모르는,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만의 비밀로 하는 것으로 단단히 약속을 했습니다.

시부모님이 비자금을 털어 마련해 주신 목걸이
시부모님이 비자금을 털어 마련해 주신 목걸이한명라
이렇게 시부모님과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부모님과 며느리인 저의 관계는 굳이 무슨 말을 주고 받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곰같은 며느리보다 여우같은 며느리가 백 번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우같은 며느리가 아닌, 곰같은 며느리과에 속하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마음에 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자 마음 먹었던 일도 행동으로 행하기 이전에 먼저 말로 꺼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성격이기에 붙임성 좋게 먼저 다가가지도 못하는 융통성 없는 성격입니다.

그런 융통성없는 며느리임에도 항상 예쁘게 봐 주시고, 마음 써 주셨던 어머님이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시장을 봐 가지고 시댁으로 향하기에, 어머님은 며느리가 사 온 반찬거리를 당신 나름으로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 가늠하였다가, 시장을 보느라고 들어 간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며느리의 가방 한켠에 넣어 두기도 하고, 당신 아들이 벗어 걸어 놓은 바지 뒷춤에 넣어 두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창원으로 이사를 온지 몇개월 되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 경북 경산에 살고 있는 둘째 언니 내외분이 일요일 오후에 우리집에 다니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도 토요일 오후에 시댁에 갔다가, 일요일 아침 일찍 둘째언니 내외분 때문에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정구지(부추)며, 풋고추며, 상추 등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았다가 차 트렁크에 넣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우리 가족이 집에 도착하여 집에 잘 도착하였다고 전화를 하였을 때, 어머님은 "며늘아~ 거기 정구지가 들어 있는 봉투 밑을 잘 찾아 보거라"하셨습니다."어머니 왜요?"하고 묻는 저에게 "아무튼 봉투를 열어보면 뭔가 있을 것이다"하고 웃으셨습니다.

서둘러서 비닐봉지를 열어 보았을 때, 그 봉지 밑에는 하얀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고, 그 편지봉투 속에는 현금 5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봉투를 열어 본 저의 마음 한켠이 울컥하고 뜨거워졌음은 물론이었습니다.

절약하고 아끼는 며느리 때문에, 그렇게 절약하는 구두쇠 며느리가 당신들 때문에 시장을 보느라고 괜한 돈을 쓴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며느리가 쓴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그런 방법으로 되돌려 주시고는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시아버님께서 손수 챙겨 주시는 보따리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이어쓰기 기사로 올린 것이 이번이 여덟 번째입니다. 
이번 기사가 유난히 늦어진 것은, 시부모님의 저의 대한 따뜻한 사랑을 적어가다 보니, 제 글을 읽는 분들에게 어쩌면 '제 잘난척', '제 자랑'으로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을 하고 말았습니다. 쓸 수 있는데 까지 저와 시부모님과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시아버님께서 손수 챙겨 주시는 보따리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이어쓰기 기사로 올린 것이 이번이 여덟 번째입니다. 
이번 기사가 유난히 늦어진 것은, 시부모님의 저의 대한 따뜻한 사랑을 적어가다 보니, 제 글을 읽는 분들에게 어쩌면 '제 잘난척', '제 자랑'으로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을 하고 말았습니다. 쓸 수 있는데 까지 저와 시부모님과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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