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은 누추했으나 추억만은 아름다웠노라

김기찬· 황인숙의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등록 2005.08.13 08:30수정 2005.08.1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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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책 표지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책 표지샘터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은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에 시인 황인숙의 산문이 어우러진 책입니다. '골목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 서울에서 태어나 '골목살이'에 이골이 난 시인이 골목이란 어떤 곳인가를 때로는 한 편의 시로, 때로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골목하면 으레 약간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떠올리게 되죠. 그리고 골목을 찍는데는 아무래도 흑백사진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는 흑백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컬러사진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소개하는 건 이 책에 이르러서 처음이다. 컬러사진은 모노톤의 사진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컬러사진은 일단 모노톤이 가지고 있는 감상을 억지한다. 있는 그대로, 눈에 보여지는 그대로를 보여 주면서 보다 직접적인 체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진가는 아마 원색의 사진이 주는 화사함과 그 화사함이 안겨주는 심리적인 따스함도 계산에 넣었을 것입니다.

골목, 세계 구성하는 모든 요소 다 들어 있는 곳

먼저 골목이란 어떤 곳인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곳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좁으면서 꼬불꼬불하게 생겨먹은 골목은 공동생활구역에 속합니다. 통행의 기능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휴식처요, 아이들의 놀이터이며 좁은 집안 대신에 쓰는 여유공간이기도 합니다.

아낙네들이 고사리를 다듬고 고추를 말리는가 하면, 아이들은 골목길 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삶의 긴밀한 끈적끈적한 관계가 맺어지던 곳, 인간적인 체취가 배어있던 골목들이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골목전문' 사진가 김기찬은 골목의 세계가 결코 변방의 세계가 아니며, 골목 안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골목에 대해서 추억에 덧대어지는 감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골목을 좁게 가두는 일이며, 골목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세계라고 말합니다.

책은 꽃과 동물, 사람들, 지붕과 기와, 담장과 벽, 그늘과 벽, 이렇게 다섯 개의 울타리로 나뉘어져 있고, 한 울타리 안에는 각각 서른 장의 사진이 우리가 마음의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꽃과 동물

사람들은 왜 개를 기를까? 고양이를 기르고, 꽃과 나무를 기를까? 생활을 치장하려는 목적으로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살아있는 것의 무엇을 치장의 수단으로 선책한 걸까? 바로 생기이다. 감정을 풍부하게 하고 영혼을 느끼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생기. 뭔가를 기르면 기르는 마음이 생긴다. 기르는 마음은 생기에 찬 마음이다.

황인숙 글 '메리라는 이름의 개 - 꽃과 동물'에서


동물이나 사람이 아무런 구별없이 섞여 지냅니다. 골목은 이렇게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구역 JSA'이었습니다.
동물이나 사람이 아무런 구별없이 섞여 지냅니다. 골목은 이렇게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구역 JSA'이었습니다.김기찬
골목은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살고, 오리가 살고, 고양이가 살고, 병아리가 살고, 봉숭아나 맨드라미같은 꽃이 살아갑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 하찮은 생물들은 누추한 세간살이가 짜증날 때마다, 삶에 지쳐 팍팍할 때마다 골목 사람들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겠지요. 꽃과 동물이 있는 골목 풍경은 보는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사람살이의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람들

이 집에 산 지 10년이 넘어간다. 동네 고샅고샅 내가 모르는 길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직도 이웃이라 할 만한 이웃이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내가 집주인이 아니고 세입자로서, 말하자면 뜨내기로 살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족 없이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골목에 살지만 어떤 면에서 이 골목에 속해 있지 않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거나 혼사가 생겨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녀도 나는 섭섭함도 궁금함도 없이 흘깃 볼 뿐이다. 나 역시 내게 무슨 경조사가 생겨도 골목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황인숙 글 '골목의 표정들 - 사람들'


골목의 어두움을 바꿔놓는 것은 밝은 햇살이며, 삶의 누추함을  바꾸는 것은 아이들이 짓는 웃음의 따스함입니다. 이런 밝음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컬러 사진이 가진 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골목의 어두움을 바꿔놓는 것은 밝은 햇살이며, 삶의 누추함을 바꾸는 것은 아이들이 짓는 웃음의 따스함입니다. 이런 밝음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컬러 사진이 가진 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김기찬
골목에는 다양한 삶의 표정이 펼쳐집니다. 심심하면 골목에 나와 벽에 기대어 세상살이를 논하고, 아이들의 장래를 논의하는 사람들, 자리를 깔고 누워 장난치는 아이들, 부엌에서 해야할 일감을 굳이 골목으로 가지고 나와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줌마, 연탄을 나르는 아저씨, 떡볶이를 파는 아줌마 등 그 많은 삶을 품고 왁자지껄하게 살아가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네 사람들의 공동살이 구역인 게지요.

그러나 시인은 이곳에서 외톨이일 뿐입니다. "나는 이 골목에 살지만 어떤 면에서 이 골목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가 겪는 소외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섭섭함도 궁금함도 없는 존재인 시인의 소외는 절대로 부당한 것이 아닐 겁니다.

다른 곳에서라면 가난이 소외를 부르겠지만, 달동네 골목 사람들은 가난해서 오히려 소외가 없습니다. 사진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스한 삶의 체취가 물씬 풍겨져 나옵니다.

지붕과 기와

그런데, 지붕은 정말 한 집의 머리인가? 떨어져서 볼 때는 그렇다. 정작 지붕 위에 올라가 보면, 지붕이 머리가 아니라 등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머리일 것 같으면 그 누구도 그 위에 발디딜 기분이 안 날 것이다. 개마고원이나 파미르 고원을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데, 고원은 등판같은 곳이지 머리같은 곳이 아니다. 지붕 위의 공간은 조그만 고원이며 거대한 코끼리의 등짝이다.

황인숙 글 '지붕의 꿈 - 지붕과 기와


비가 새는 지붕에 씌운 천막이 날아가지 않게끔 눌러놓은 기왓장들. 가난이란 이렇게 불편한 것이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삶의 내용이 아닐까요?
비가 새는 지붕에 씌운 천막이 날아가지 않게끔 눌러놓은 기왓장들. 가난이란 이렇게 불편한 것이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삶의 내용이 아닐까요?김기찬
골목살이에 이골난 사람답게 '지붕이 머리가 아니라 등판'이라는 시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은 비가 줄줄 새는 지붕을 고치고 살 여력이 없습니다. 비 새는 지붕에다 천막을 덮고 그 천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기왓장을 눌러 놓는 것으로 임시 방편을 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또 다시 비가 새게 되면 지붕을 밟고 올라가 천막의 이곳 저곳을 들추어보고 비가 새는 곳을 찾아내서 '땜방'을 하고 내려옵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등짝 신세로 전락한 지붕들에 대한 연민보다는 지붕이라는 무생물들의 지난한 한 살이가 더욱 애처로웠습니다.

담장과 벽

골목의 표정을 결정하는 건 벽과 담장이다. 높은 벽 낮은 벽, 환한 벽 어두운 벽, 단정한 벽 울퉁불퉁한 벽, 축축한 담 바짝 마른 담, 장미벼락이 쏟아지는 담 유리조각이 내리꽂힌 담, 깨끗한 담 낙서로 뒤덮인 담, 벽과 담장에는 '개조심', '소변금지', '주차금지'가 있고 '심령부흥회', '유명 의류 폭탄 세일', '월세방 있음'이 있고, 구의원 선거 포스터가 있고, 도시 가스 파이프가 있고 화살표가 있고 나팔꽃이 있다. 그리고 어떤 외딴 골목쟁이의 담장과 벽에는 아무 것도 없다. 간혹 취객의 오줌자국이 흘러내릴 뿐.

황인숙 글 '무궁한 외계 - 담장과 벽'


골목의 담장과 벽은 경계를 표시하지만 결코 근엄하지는 않습니다. 온갖 낙서로 뒤덮여 있기도 하고 광고물들이 그야말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담장과 벽에 은유로 가득찬 그림을 그려놓지만 어른들은 '소변금지' 가위 따위를 그려놓는 직설적인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개구쟁이들이 온갖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가 된 벽. 혹시 저 낙서들은 답답해 하는 아이들에게는 창문 같은 것이 아닐까요? 창문과 그림, 둘 다 소통을 위한 장치라는 것이지요.
개구쟁이들이 온갖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가 된 벽. 혹시 저 낙서들은 답답해 하는 아이들에게는 창문 같은 것이 아닐까요? 창문과 그림, 둘 다 소통을 위한 장치라는 것이지요.김기찬
사진들은 담장과 벽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수록 훨씬 더 다양한 세상이 숨어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늘과 적막

누구 시에선가 '연탄가스 같이 깔리는 비애'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절절한 표현이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내일에 대한 아무 희망 없이, 저와 같이 삶이 질척거리는 어두운 골목에 들어설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가 가슴속에 연탄가스처럼 깔릴 것이다. 그때 어느 집 낮은 창문에선가 촉수 낮은 불빛과 함께 라디오의 구슬픈 옛 노래라도 흘러나오면 가슴은 더욱 저며지는 듯하겠지.

황인숙의 글 '기우뚱한 옛날 동네 - 그늘과 적막


골목에 기대앉은 노인의 표정이 무척 심심해 보입니다. 이런 때 그 옛날 노인들은 바지 골마리를 까고 이를 잡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빛바랜 추억의 한 토막이지요.
골목에 기대앉은 노인의 표정이 무척 심심해 보입니다. 이런 때 그 옛날 노인들은 바지 골마리를 까고 이를 잡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빛바랜 추억의 한 토막이지요.김기찬
골목은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이 좁으니까 그늘도 금방 집니다. 그늘이 지면 골목은 유난히 적막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그 쓸쓸함은 그늘 속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에게로 금방 전염되고 사진을 바라보는 이에게까지 옮아 옵니다.

사진은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하는 기술

골목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의 황혼, 그 끝자락에 골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저분한 골목을 빠져나와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왔습니다. 이젠 제법 생활의 여유를 누리며 골목에서의 삶을 추억합니다.

그러나 추억은 추억일 뿐, 이젠 더 이상의 더러움과 누추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윙윙거리는 청소기로 집안을 청소하고, 바퀴벌레 구제약을 뿌리고 집안의 청결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더러움과 어두움을 터럭만큼도 용납하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고 여린 생명의 존재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함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골목의 물리적 공간은 좁았지만 작은 것들의 삶을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의 공간만은 더 넓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골목에서 정말 많은 사람, 많은 사건, 많은 풍경들을 만났다. 지금도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풍경들은 이 세계가 앞으로 수억 년 동안 계속 성장하고 진화한다고 해도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사진은 그처럼 단 한순간으로 존재하는 풍경을 내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기억하는 기술이다.

사진가 김기찬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40년 동안 카메라를 메고 골목을 누빈 사진가 덕분에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나마 갖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김기찬의 사진과 황인숙 시인의 글을 들여다 보는 시간은 골목에 살아있던 인정과 사람의 더운 체취가 그리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운 것들은 다 등뒤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책이름 :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지은이:김기찬. 황인숙
출판사 : 샘터 
값:15,000원

덧붙이는 글 책이름 :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지은이:김기찬. 황인숙
출판사 : 샘터 
값:15,000원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김기찬 사진, 황인숙 글,
샘터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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