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사람에겐 흥미가 없소!"

[서평] 웨난, 양스 고고학 보고서 <북경의 명십삼릉>

등록 2005.08.13 09:20수정 2005.08.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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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웨난, 양스 <북경의 명십삼릉> 앞표지

웨난, 양스 <북경의 명십삼릉> 앞표지 ⓒ 일빛

"현재 사회적으로 '뿌리를 찾는 문학'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이야말로 진정한 '뿌리를 찾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릉(定陵) 발굴대 대장 조기창이 발문에다 이렇게 큰소리친 책의 이름은 <북경의 명십삼릉>이다. 북경의 명십삼릉 ? 제목으로 보아서는 무슨 '왕릉도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책은 아니다. 조기창의 말대로, '뿌리를 찾는 문학'이다. 제목에 나온 '명십삼릉'이 명나라 13황릉을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명나라 권력의 뿌리를 찾는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명나라는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선조가 경영한 마지막 황제 국가다. 몽골족이 경영한 원나라나 여진족이 경영한 청나라와는 다른 것이다.

주은래 "발굴 동의"

명십삼릉 발굴의 중심에는 명나라 역사 전공자 오함이 있다. 1955년 10월 3일, 북경 부시장 오함 등은 '명나라 장릉(長陵) 발굴에 대한 지시를 요청하는 보고서'를 정무원에 올렸고 이것은 비서장 습증훈에 의해 주은래 총리에게 상신되었다.

이 사실을 안 문화부 문화재국 국장 정진탁과 중국 과학원 고고연구소 부소장 하내(오함의 역사학과 동기)가 완강히 반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인 주은래가 결재 보고서에 '발굴 동의'라고 썼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황릉의 발굴이 확정되자 고고연구소 부소장이며 주임인 하내는 발굴 지휘 책임자가 됐고 발굴대장이며 제자인 조기창에게 발굴 조사 지시를 내렸다.


주체의 무덤 축조에 동원된 백성은 40만

북경 창평현에 있는 명십삼릉의 원조는 원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주체다. 연왕인 그는 간신의 무리가 황제 앞에서 농간을 부린다는 것을 구실로 황궁으로 진격하였으며 명나라 2대 황제인 주원장의 장손 주윤문은 겁에 질려 자살하였다 한다. 이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3대 황제가 된 주체는 성조로서 명십삼릉의 시작인 장릉과 거대한 묘역을 세웠던 것이다. 그때의 상황을 <북경의 명십삼릉>은 이렇게 알리고 있다.


영락 황제가 능묘를 조영하기 위해 토지를 징발하라는 성지를 내리자 황토산 주변 100여 리가 금지구역으로 변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들은 열흘 이내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중략) 출동한 관병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자기 땅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중략)
영락 7년, 방대한 능묘 공사가 황토산 아래에서 정식으로 시작됐다. 징발된 인원은 병사와 민간인을 포함하여 40만 명쯤 됐다.
-<북경의 명십삼릉> 1권 38~40쪽에서


발굴대장 조기창은 장릉 발굴에 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잘못 뚫고들어갔다간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명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48년간)한 신종 주익균의 능묘인 정묘를 발굴하게 된다.

주익균의 무덤 축조에 들어간 돈은 백성들이 10년간 먹을 식량에 해당

주익균이 22~28세까지 미친 듯이 만든 이 정릉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전체 공정에 들어간 은 800만 냥은 국고 수입의 2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요, 백성들이 1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주익균은 자기의 능묘를 미리 지은 뒤 황후와 왕비, 대신들을 데리고 자기의 수궁에서 대연회를 벌려놓고 마음껏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주익균 사후에 자신의 시신이 들어간 관을 도적 맞지 않도록 능묘를 아주 견고하게 건축하였고 입관 후 아주 엄밀하게 봉해 놓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릉 발굴의 성공과 정릉 박물관 설립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a 모택동

모택동

모택동 "인민의 재산과 노고가 아깝군"

정릉을 찾은 거물은 많지만, 역시 가장 큰 거물은 모택동이다. 1958년 봄, 십삼릉 저수지 건설 현장에 정치적 색채가 짙은 현장 노동 참가를 위해 가는 길에 들른 것이었다. 능은전을 둘러보고 나올 때 그가 한 말은 <북경의 명십삼릉>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기운찬 대전이로군…. 죽은 사람이 이런 대전을 갖고 있는게 무슨 소용이지? 인민의 재산과 노고가 아깝군."
"봉건 계급의 생활관이지요."
주은래가 모택동의 말을 받았다.
-<북경의 명십삼릉> 2권 314쪽에서


또한 모택동이 정릉 지하 현궁 참관 계획을 갑자기 취소한 장면을 <북경의 명십삼릉>은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얼굴에 잠시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주은래가 재빨리 눈치를 채고 그에게 물었다.
"주석, 정릉에 가시렵니까?"
"다음에 다시 가도록 하지."
모택동은 이렇게 말하고 차에 올라 십삼릉 저수지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택동이 갑자기 정릉 지하 현궁 참관 계획을 바꾼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중국 고위 지도자 가운데 오직 모택동만 지하 궁전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북경의 명십삼릉> 2권 315쪽에서


1965년 9월, 주은래가 파키스탄 대통령을 대동하고 정릉을 방문했을 때 오함과의 대화 내용을 <북경의 명십삼릉>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a 주은래

주은래

"이곳은 열세 명의 제황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지요. 열세 곳 모두 이것과 유사합니다."
오함이 총리의 말을 이었다.
"장릉은 이곳 정릉보다 규모가 더 크지요. 발굴할 경우 정말 장관일 것입니다. 연구 가치도 정릉보다 더 큰 곳이구요."
(중략)
"장릉을 발굴하면 어떨까요?"
"발굴에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대략 40만 원 정도입니다."
오함은 흥분해 있었다. 주혼도는 오함을 손으로 슬쩍 찌르면서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40만 원으로는 부족해요."
(중략)
오함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총리 각하, 장릉 발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은래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죽은 사람에겐 흥미가 없소!"
-<북경의 명십삼릉> 2권 319~320쪽에서


이로써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장릉 발굴의 도전은 길이 막히게 되었고, 몇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장릉을 비롯한 방대한 13능의 지하 건축은 여전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정릉 박물관을 통하여 지하건축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정릉을 관람하는 것으로 우리는 명십삼릉의 그 엄청난 건축술을 짐작할 뿐이다.

문화대혁명과 명십삼릉 발굴 주도자 오함의 최후

1958년 9월 6일 신화통신이 전세계에 정릉 발굴 소식을 타전한 뒤, 미국의 AP통신사에서는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발굴은 기존의 어떤 고고학적 발굴과도 다르며, 중국의 고고학이 이미 성숙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중국 고고학계는 침묵했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릉 발굴에 관한 학술 보고서가 단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북경의 저명 문인인 오함, 등척, 요말사 등이 오남성이란 공동 필명으로 북경시 당 기관지인 <전선>(前線)에 '삼가촌찰기(三家村札記)'라는 잡문을 썼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칼럼에서 주로 고전, 역사극 등의 교양 문제나 사회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해서파관(海瑞罷官)>이 일군의 '좌파' 학자들에게서 '자산 계급의 학술적 권위'로 지목당하고 맹렬히 비판당한 이후, <삼가촌찰기>를 쓴 세 사람은 자아비판을 하였으며 요문원 등 사인방에 의해 '삼가촌 반당집단'으로 지목되어 비판받았다. 끝내 오함과 등척은 박해 속에서 죽고 말았다. 죽음을 앞둔 1969년 10월의 오함의 심경을 <북경의 명십삼릉>은 이렇게 그려내었다.

작열하는 햇살 아래 사지가 고목에 묶인 그의 목으로 뜨거운 음식 찌꺼기가 부어졌다. 가죽 채찍이 끊임없이 누렇게 뜬 그의 마른 몸을 내갈겼고, 마귀의 발톱 같은 뭇사람들의 손이 귀며 머리를 잡아 뜯고 눈을 후벼 팠다. (중략)
명십삼릉 발굴은 학창 시절부터 그가 바라던 일이었고, 또한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그가 온힘을 다해 추진했던 가장 큰 문화 사업이었다. 만력제후의 관곽이 훼손된 뒤 그는 정릉 발굴에 대한 득과 실을 다시 한 번 따져보기도 했다. 황제와 두 명의 황후의 유골이 솟구치는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로소 그는 10년 전 오랜 친구이자 논적인 정진탁과 하내의 예견에 동의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북경의 명십삼릉> 1권 18~19쪽에서


무덤 속으로까지 가지고 가려는 황제의 권력욕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기 속에서도 다행히 발굴대장 조기창이 살아남았기에 이 책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경의 명십삼릉>은 언론인 웨난과 수필가 양스(조기창의 아내)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조기창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성을 굶주림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자신의 웅대한 무덤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휩쓸고 명나라를 넘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다가 여진족 누르하치(청나라 태조)의 힘마저 키워준 주익균. 무덤 속으로까지 가지고 가려는 그의 권력욕은, 어떤 통치자가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사람인가를 일깨워준다.

또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처단당한 소신있는 지식인의 고뇌와 뼈아픈 모습은, 우리가 신중히 돌아봐야 할, 지나온 역사가 남겨주는 '슬픈 그늘'이다.

덧붙이는 글 | <북경의 명십삼릉>(전2권) 웨난, 양스 쓰고 유소영 옮김/2005년 7월 10일(개정 2판) 일빛 펴냄/223×152mm(A5신) 392․388쪽/책값 각권 1만50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북경의 명십삼릉>(전2권) 웨난, 양스 쓰고 유소영 옮김/2005년 7월 10일(개정 2판) 일빛 펴냄/223×152mm(A5신) 392․388쪽/책값 각권 1만50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북경의 명십삼릉 1

웨난 지음, 유소영 옮김,
일빛,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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