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그거 참 서럽네요!"

40대 후반의 가장, 가족에게 소외감 느낄 때

등록 2005.08.13 14:28수정 2005.08.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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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들이 사온 북한산 들쭉술

아들이 사온 북한산 들쭉술 ⓒ 한성수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지난 월요일부터 4박5일의 일정으로 강원도 고성에 있는 스카우트 수련장으로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날 아내가 준비물을 챙기는데, 야영을 해서인지 가짓수가 많습니다.


일정 중 1박 2일 동안 금강산캠프도 준비되어 있으므로, 나는 아들에게 팔을 내어주고 나란히 누웠습니다.

"아들아! 올해는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혼을 빼앗기 위해 말과 글, 심지어 성씨마저도 일본식으로 바꾸었단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는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들은 할아버지가 '소마굿간 아래에 구덩이를 파서 숨겨놓은 종자를 죽창을 쑤셔서 기어이 찾아내어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아갔다'는 것은 너도 할머니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킵니다. 아들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붕 떠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을 것 같지가 않아, 나는 애써 말을 줄입니다.

"아들아! 북한은 같은 피붙이가 사는 우리 땅인데도 마음대로 오고 갈 수가 없다. 이런 뜻깊은 시기에, 너는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반드시 그 느낌을 글로 적었으면 좋겠구나."

문제는 아들이 떠난 다음날, 아들의 전화가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아들은 제 엄마와 즐겁게 재잘거립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만, 아내는 끝내 내게 수화기를 건네주지 않습니다. 그저께도 아들에게 전화가 왔지만 제 엄마만 찾아서는 한참을 통화했고 아내는 무심하게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


"나도 한 번 바꿔주지 그러냐!"

내가 볼멘소리를 하자, 아내는 "전화하려고 줄 선 아이들이 많다고 그래서…"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딸 아이에게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더니, 딸 아이의 대답은 나를 더 아프게 합니다.


"사실 엄마가 더 다정다감하고 이야기하기가 편하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좀 부담스러워요."

딸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급히 "그런 뜻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내 굳은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날 밤 아내와 딸은 선풍기 틀어놓고 거실에 자고, 나는 끙끙 앓으면서 문을 꼭 닫아놓고 안방에서 잠을 청합니다.

사십 중반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 이 무슨 나약한 모습인가 싶어 더욱 마음이 아립니다. 최명희 선생이 쓴 '혼불'을 다시 읽으며 가슴을 감싸안아 보지만 서러운 마음은 쉽게 가시지가 않습니다. 나는 기어이 밖으로 나서서 후텁지근한 여름의 밤공기를 들이키다가,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왔습니다.

어제 점심밥을 먹고 걷다가 동료가 불쑥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전에는 월급날, 월급봉투를 건네면 아내가 '당신, 한 달 동안 참 고생이 많았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히면서 동전까지 셌지요. 통닭이라도 사가면 '우리 아버지, 최고!'라며 아이들이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는데, 요새는 아버지의 노고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은행 현금지급기에 카드만 넣으면 그냥 돈이 좌르륵, 빠져 나온다고 생각해요."

어제 저녁에 퇴근을 하니 아들이 돌아와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라며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사왔다는 '들쭉술'을 건넵니다. 나는 병뚜껑을 따서 선홍색 액체를 혀 끝에 묻힙니다. 그리고 천천히 한모금을 입안에 넣습니다.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가득 고입니다.

이제 액체는 밥줄을 타고 정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립니다. 며칠동안 가족에게 품었던 서운한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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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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