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몰랐다, 청년 윤봉길 의사를

[우리가족과 8·15] 중국 상하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아

등록 2005.08.14 08:43수정 2005.08.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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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주년을 맞이해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정보 교류와 친목을 위한 작은 모임인 다음 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에서는 조촐하게나마 광복을 기념하는 모임 및 신입회원을 환영하는 자리를 15일 저녁 시간에 한 회원의 집에서 가지려고 준비 중이다.

이곳에 살면서 광복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사람이 한 분 있다. 어릴 때 역사 교과서에서 보아 잘 알고 있는 윤봉길 의사이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소중한 목숨을 나라를 위해 던진 의사의 숭고한 뜻을 마음에 다시 담기 위해 13일 토요일 오후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현 루쉰(魯迅)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인 '매정(梅亭, 윤 의사의 호 '매헌(梅軒)'을 따 지은 정자)'을 찾았다.

a 윤봉길 의사 흉상. 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윤봉길 의사 흉상. 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 유창하

윤봉길 기념관(매정) 1층에는 윤 의사의 흉상이 모셔져 있고 성장 과정과 농민활동과 상하이에서의 활동 등이 사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폭탄 투척 당시 연단의 혼란한 상황과 윤 의사가 체포되는 과정을 촬영한 영상물이 짤막하게 작은 스크린으로 상영되고 있다.

그리고 투척 당시의 수통과 도시락 모형이 있고 윤봉길 의사가 의거 결전을 다지는 기념 촬영을 한 후 김구 선생에게 주었다는 회중시계도 있다. 2층에는 윤 의사의 영정이 있으며 어머니에게 남긴 글과 농민독본의 글이 액자에 걸려 있다. 조그만 기념물품 판매코너도 같이 있다.

a 윤 의사가  위장하여 던진 수통 폭탄과 위장 도시락

윤 의사가 위장하여 던진 수통 폭탄과 위장 도시락 ⓒ 유창하

몰려드는 방문객, 윤봉길 의사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

a 광복절 연휴를 맞아 많은 한국관광객이 홍커우공원 윤봉길기념관(매정)을 찾았다.

광복절 연휴를 맞아 많은 한국관광객이 홍커우공원 윤봉길기념관(매정)을 찾았다. ⓒ 유창하

오늘도 한국에서 온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간다. 상하이 홍커우공원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현장은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빠지지 않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끊이지 않는 참배객의 물결에 매정을 안내하는 두 명의 중국인 여성 가이드는 쉴 틈이 없다.

여름 방학과 휴가철로 인해 평소보다 많아 매정을 찾는 한국인 방문객이 매일 1천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부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해외 여행을 하는 학생들과 가족 단위로 상하이 인근 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이다.

관람을 하고 나오는 서울에서 온 여고생에게 관람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질문이 어려웠던지 머뭇거리더니 "멋있다"는 이야기 밖에 하지 못한다. 일행인 다른 여고생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전 정보 없이 외국관광에 따라 나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쓰레하였다.


또 다른 한 젊은 청년에게 물어 보았다. "너무 빨리 지나가니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 다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게 안타깝다"고 말하며 총총 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아마도 빡빡하게 채워지는 다음 일정들이 그를 경황없이 만들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a 윤봉길기념관 앞 정원에는 이날 '상사화'가 피어 애틋하게 윤 의사를 기리고 있다.

윤봉길기념관 앞 정원에는 이날 '상사화'가 피어 애틋하게 윤 의사를 기리고 있다. ⓒ 유창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매정기념관 중국인 여성 가이드 쩡러(鄭樂, 28)씨에게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들을 대하며 특별히 느끼는 점이 있느냐 물으니 "많은 사람을 안내하다 보니 시간이 없어 짧은 시간에 설명을 하다 보니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는 게 안타깝다"고 한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가 남긴 글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한국 아주머니를 볼 때 감동을 받기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모습에서 오전 7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쉴 틈 없는 고단한 일정이지만 가이드로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음도 느껴졌다(매정기념관은 중국 홍커우구(虹口區)에서 운영한다. 입장료 우리 돈 2천원).

이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윤봉길 의사는 참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까? '일제의 은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찾아온다고 고마워하실까?


매정 밖 정원에는 몇송이 상사화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다. 윤 의사의 못다한 짧은 생을 달래기라도 하듯 애처럽게 서 있다.

윤봉길 의사의 짧고도 굵은 길

윤봉길 의사. 그는 기마부대, 포대 등 1만여 명이 도열한 일본군 기념식장에 수통 폭탄을 정확하게 던져 일본군 상해지구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해군 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스, 일본 거류민 가와바다 단장, 주중 무라이 총영사를 응징한 조선독립 운동가이다.

a 윤봉길 폭탄 투척 현장 기념 비석.

윤봉길 폭탄 투척 현장 기념 비석. ⓒ 유창하

윤 의사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일본학교에서 공부하기 싫다고 서당에 가서 한학을 공부하며 성장하였다. 12살 때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으로 항일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17세에 시집을 발간하고 18세에 농촌계몽독서회를 조직하여 5년간 지속적으로 농촌 계몽활동을 하였다.

19세에 이미 윤 의사는 <농민독본>이라는 농민서적을 발간하여 '농민의 깨우침이 없이 조선의 존재의 존재가 있을 수 없고, 농민의 손에 의해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예술과 문학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농민운동의 방향성을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나름대로 제시한다.

그러다 농민 계몽운동의 한계를 깨우치고 1930년 22세 때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란 유서를 남기고 오직 조국독립에 전념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만주 독립군기지를 둘러보고 칭다오(靑島)에 도착한 후 배편으로 얼마 후 상하이에 다시 들어간다. 상하이에서 한인공우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과 노동운동을 한다.

독립운동가인 김구, 이유필, 김두봉 등과 교류하며 24세 때인 1932년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하고,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한 후 상해 의거를 실행한다. 폭탄 투척 이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었다가 윤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가나자와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을 당하여 24세의 짦은 생을 마감한다.

윤봉길 의사는 24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어린 나이 때부터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농민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상하이임시정부 인사와 교류하며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상해의거를 성공시켜 세계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윤 의사는 순수한 열정의 청년이었다.

a 윤봉길 의사의 체포되는 장면과 아수라장 촬영 현장이 짧게 방영된다.

윤봉길 의사의 체포되는 장면과 아수라장 촬영 현장이 짧게 방영된다. ⓒ 유창하

윤봉길 의사는 젊은 혈기의 '욱'하는 감정으로 순간적으로 폭탄을 든 청년이 아니다. 윤 의사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며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운동의 모범을 보이는 운동가였다. 일제 20년대 이후로 암울하던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윤 의사 의거는 일제 탄압기인 30년대에 변절자가 속출하고 활동을 포기하고 위축되는 국내외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각 노선을 반성하게 하고, 독립운동의 자신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활력을 띄게 되고 대한민국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중국과도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윤 의사는 어린 나이부터 농촌운동에서 뛰어난 재능과 신념을 보이고, 변절하지 않는 청년으로 독립운동의 모범을 보였다. 학교는 가지 않았지만 19세에 농민 책을 쓸 정도로 뛰어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윤붕길 의사는 꺼지지 않는 광복의 땔감인 석탄이었고 횃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인 이 땅의 운동가들에게 불을 밝히는 마음의 등불이고 푯대이다. 나는 윤 의사를 그동안 너무나 몰랐다. 윤 의사는 농민 노동자와 어깨하며 함께 걸어가는, 민족의 미래를 일깨우는 조국 광복의 길잡이였다.

매정기념관 2층 액자에 붙어 있는 윤 의사가 쓴 시 <한층 더 강인한 사랑>을 읽노라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저려 눈물을 머금게 한다. 윤 의사는 정말 이 시대 운동가의 표상이다.

a 윤봉길 의사의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하는 '시'

윤봉길 의사의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하는 '시' ⓒ 유창하

한층 더 강인한 사랑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와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년 10월18일 중국 칭다오(靑島)에서의 서신)

덧붙이는 글 | <우리가족과 8·15>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우리가족과 8·15>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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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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