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추리소설의 대안을 모색하다

추리물 장르의 현대적 복원과 해체,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등록 2005.08.15 11:36수정 2005.08.1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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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미스터리 연구회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츠노시마라는 무인도로 여행을 떠난다. 츠노시마는 반년 전, 수수께끼의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와 그의 부인, 고용인 부부 등이 처참하게 살해된 곳. 이들이 머물기로 한 ‘십각관(十角館)’은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십각형 모양의 건물이다. 곧 살인예고와 함께 한 명이 실제로 살해당하면서 ‘자신들 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불안은 커져만 간다.-<십각관의 살인>의 줄거리

아무 생각 없이 신작 리스트를 훑어보던 중, ‘아야츠지 유키토’와 ‘십각관’ 두 단어를 목격하고 오뉴월 송장마냥 얼어붙고 말았다. 뼈대 있는 추리소설 팬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그 대망의 첫 작품인 <십각관의 살인>(87)이 드디어 재출간됐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기존 하드보일드 탐정 추리물들에 반기를 들고 '정통 미스터리로 회귀하자'는 기치 아래 만들어진 '밀실살인'류 추리소설이다.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이 시리즈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년탐정 김전일>식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관 시리즈’는 <십각관의 살인>을 시작으로 <수차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인형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흑묘관의 살인>등 총 6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시리즈 전체가 97년에 출간된 바 있으나, 절판된 이후로는 구해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금번 <십각관의 살인>을 시작으로 ‘관 시리즈’가 모두 재출간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어 추리소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메타 추리소설‘의 선구자, 아야츠지 유키토

a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 한스미디어

아야츠지 유키토는 영화 <스크림>의 시나리오 작가 캐빈 윌리엄스와 비견될 만하다. 이 닮은 꼴 작가들은 특정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맹신도였으며,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고 재구성할 만큼 충분히 영민했다.

캐빈 윌리엄스가 <스크림>, <패컬티> 등의 작품들에서 ‘호러영화 10계명’ 따위의 법칙들을 거론하며 장르의 관습을 해체했던 장면을 상기해보자. 아야츠지 유키토도 다르지 않다. 대학시절 ‘미스터리 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십각관의 살인>을 집필한 그는 기존 추리물의 관습화 된 밀실살인 트릭들을 열거하면서 또 한편으로 그것을 파괴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일종의 메타 추리소설로 거론될 가치가 있다.


물론 아야츠지 유키토가 기존 추리소설의 관습을 완벽하게 뒤흔들어 놓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은 과거 추리물이 ‘대접받던’ 영광의 시기를 충실히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어진 해체의 미학은 ‘반전’이라는 흔하디흔한 표현으로 정리될 수 없는 장르의 묘미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한 미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관 시리즈’의 첫 작품인 <십각관의 살인>이다.

<십각관의 살인>을 독해하는데 유용한 첫 번째 장치 - 구조의 이원화


이 흥미로운 소설을 좀 더 재미있게 독해하기 위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주요 장치를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구조의 이원화’와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아가사 크리스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각관의 살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개성은 ‘구분서술’이다. 이 소설은 한 개의 챕터를 ‘섬’과 ‘육지’ 두 가지 시점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으며, 섬 안에 있는 학생들의 이름 역시 ‘별명’과 ‘실명’으로 구분 짓고 있다. 이러한 이원화 구조는 서로 복잡하계 연계되면서 마지막 ‘의외의 결과’를 가능케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이 중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특히 중요하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너털웃음이 나올 만한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들의 이름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 앨러리 퀸이나 애드가 앨런 포 같은- 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스터리 연구회’ 학생들이 실명 대신 이 작가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탓이다.

이러한 설정이 단순히 아야츠지 유키토 개인의 취향이나 선배 작가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별명’의 사용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익명성을 전재할 수 있게 함으로서, 텍스트 외부에서 범인을 쫒는 독자들에게 혼돈을 야기 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실명과 별명의 구분서술은 ‘섬’과 ‘육지’로 나뉘어 진행되는 시점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육지가 실명이 통용되는 사회라면, 섬에서는 실명이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육지의 A와 섬 안의 A가 동일 인물인지, 혹은 다른 인물인지 알 수 없는데,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트릭이다. 독자들이 섬 안에 고립된 학생들의 실명을 아는 순간, 진짜 범인은 정체를 드러낸다.

<십각관의 살인>을 독해하는데 유용한 두 번째 장치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해문출판사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십각관의 살인>의 초반 설정이 ‘밀실살인’류 추리물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아가사 크리스티)와 매우 닮아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십각관의 살인>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한 직접적 언급까지 수차례 등장한다.

“…(이 섬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식의 연속살인이라도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어요?” (본문 35페이지)

“범인이 탐정까지 죽이고 자살한다고 해봐요, 그야말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되어버리겠네요” (본문 109페이지)


<십각관의 살인>의 기본적인 플롯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완벽하게 닮아있다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직접 이야기 했듯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수차례 언급하며 이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독자를 향한 일종의 트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식의 결말을 예상케 함으로써 또 다른 생각의 여지를 은연중에 봉쇄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후 수많은 밀실트릭들이 정형화된 가운데, 이 장르의 관습을 해체하는 쾌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십각관의 살인>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텍스트인 동시에, 그 자체가 매우 설득력 있는 미스터리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현대 추리소설의 대안을 모색하는 아야트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사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들은 유난히 작위적인 설정과 매력 없는 탐정 캐릭터로 인해 극의 재미가 반감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는데, <십각관의 살인>도 예외는 아니다.

‘관 시리즈’를 살펴보면 밀실트릭 자체의 논리적 구성은 탁월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주변 전개가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리즈의 탐정 캐릭터 ‘시마다’에게서는 홈즈나 뤼팽, 포와로 같은 명탐정들의 치밀함이나 섹시한 매력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관 시리즈’는 20년 가까이 사랑받아왔다. 여기에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탁월한 장르 이해가 한 몫하고 있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동일한 사건 패턴과 인물(탐정 캐릭터 ‘시마다’와 6개의 건물을 지은 ‘나카무라 세이지’)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고전적인 긴장감을 조성해놓고, 사건의 전개를 통해 이러한 ‘장르적 익숙함’을 배신한다.

다시 말해, ‘관 시리즈’에는 고전추리 장르의 충실한 복원과 해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기인하는 전복의 에너지는 여타의 문제들을 희석시킬만한 장르적 쾌감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마치 프로레슬링 경기가 뚜렷한 인공성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반전’이나 ‘폭력성’에 함몰된 현대 추리소설에 식상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그 대안을 <십각관의 살인>에서 찾아볼 만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름 밤, 일독을 권한다.

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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