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민이 만든 축제, 관 지원 없이 24년이나 계속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면민 자생 축제 '연풍조령제'

등록 2005.08.15 11:38수정 2005.08.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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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야제 개막에 터진 화려한 폭죽도 면단위 행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전야제 개막에 터진 화려한 폭죽도 면단위 행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 곽교신

8월 14, 15일 양일간, 현재 주민등록인구 2904명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서 '연풍면청년회'가 주관하는 주민 축제 '제24회 연풍조령제'가 조촐한 광복절 기념식을 겸하며 관내 연풍중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시장통에서 시작되었던 이 행사는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이 24년째 계속되었다고 한다.

면 단위의 주민 축제가 관의 재정 지원 없이 무려 24년간 꾸준히 계속되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자생 축제의 가치를 인정해 3년 전부터 군비가 지원되기 시작해서 올해는 행사 예산 2400만원 중 1500만원이 지원됐는데, 그 전에는 관의 지원이 전혀 없이 오로지 주민의 자발적 성금품으로만 치러졌다고 한다.


기획부터 진행까지 모든 일을 연풍면 청년회에서 주관하는데, 첫 행사를 치른 해가 1981년이라는 청년회 측의 말에 짚이는 게 있어 역대 청년회장들에게 질문 공세를 폈다.

81년에 축제를 처음 시작했으면, 집권 명분과 정통성이 결여된 전두환 정권이 민심 수습 차원으로 추진한 '국풍 81' 등 돌출식 대중문화행사와 3S(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 아래 벌이던 많은 지방 행사의 하나로 연풍축제도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여 이 부분을 끈질기게 물었다.

a 모래주머니 던지기는 어른들 성화에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정치인이 나선들 고단한 국민의 일상을 파란 하늘처럼 시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모래주머니 던지기는 어른들 성화에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정치인이 나선들 고단한 국민의 일상을 파란 하늘처럼 시원하게 만들 수 있을까. ⓒ 곽교신

그러나 청년회장 유진호(43)씨 등 역대 청년회장들은 연풍조령제가 관의 권유나 자금 지원이 없던 철저한 자생적 주민 축제로 출발했음을 강조했다. 오히려 축제 규모가 커지고 주민 속으로 깊게 뿌리내리면서 임명제 시절의 단체장이나 각종 선거 출마예정자들이 선심성 자금 지원을 자주 제의했으나 "이 축제를 정치의 노리개로 만들 수는 없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다만 드러내고 말은 않으나, 81년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으로 편안하진 않던 사회 전반의 시대적 어두움이 연풍면 주민 사이에도 깔려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억눌린 분위기를 쇄신하자는 공감대가 청년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대화 사이에 짐작할 수는 있었다.

면단위 작은 마을에 넘쳐나는 문화적 역량


a 큰 행사에서나 보는 금속활자 주조 시연장.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의 후계자인 임인호(43, 전수조교)씨의 문화적 묵직함도 이 마을에선 그저 '일개 주민'일 뿐이다.

큰 행사에서나 보는 금속활자 주조 시연장.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의 후계자인 임인호(43, 전수조교)씨의 문화적 묵직함도 이 마을에선 그저 '일개 주민'일 뿐이다. ⓒ 곽교신

a 전국에서 꼽는 한지 장인 안치용(45, 신풍한지)의 한지 뜨기 시연장. 금속활자 장인과 뛰어난 역량의 전통한지 장인이 원주민으로 같은 면에 사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전국에서 꼽는 한지 장인 안치용(45, 신풍한지)의 한지 뜨기 시연장. 금속활자 장인과 뛰어난 역량의 전통한지 장인이 원주민으로 같은 면에 사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 곽교신

어쨌든 축제 첫 회에 난 아이가 축제를 보고 자랐고 이젠 청년회원이 되었다. 작은 면에서 24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주민 주도로 순수하게 운영해 온 축제는 연풍 면민이라는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날 마련된 각종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면민들의 환한 얼굴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각 리 단위의 차일 밑에는 동네 부녀회원들이 준비한 음식이 푸짐히 차려졌다. 점심을 먹으러 행사 진행자 몇 명과 특정 마을을 지정 받아 차일 아래로 갔으나 빈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출신 마을 구분은 의미가 없었고 연풍면 전체가 그냥 '내 동네'의 개념이어서 아무 마을이고 빈자리에 앉으니 부녀회원들이 음식을 날라다 준다.


축제 취재를 가면 당연히 식권을 사야 식사가 해결되었던 기억뿐이니, 연풍면의 이 모습은 추억의 드라마 <전원일기> 속의 한 장면에 앉아 있는 착각을 하게 했다. 배불리 먹은 모든 음식이 청년회의 식자재 예산 지원을 받아 마련된 것으로 안 것도 또 하나의 착각이었다.

식자재비로 행사예산에서 마을에 지원하는 법은 없고, 전통적으로 마을 이장의 책임 아래 십시일반으로 음식을 마련한다고. 어쩐지 나물의 들기름 향이나 부침개 속의 꾸미들이 시골 친척집에서 먹는 정겨운 그 맛이다.

이런 정겨운 축제에까지 섣불리 경제 논리를 들이밀면 그것이 바로 탁상 행정의 표본이다.

연풍조령제는 지자체 축제가 나갈 방향의 모델

a 공은 공이고 사는 사. 면 전체가 친척 또는 친구이나 남녀혼합 10명의 선수(?)들이 벌인 마을대항 줄다리기에서는 선배고 사촌형이고 봐주는 법 없이 안면몰수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 면 전체가 친척 또는 친구이나 남녀혼합 10명의 선수(?)들이 벌인 마을대항 줄다리기에서는 선배고 사촌형이고 봐주는 법 없이 안면몰수다. ⓒ 곽교신

이틀간 축제를 지켜보며 "끊김없이 연풍조령제가 진행될 수 있었던 의문"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서 풀렸다. '일체의 외부 성금을 모두 거절하였다'는 바로 그것. 자치단체 축제들은 단체장이 바뀌면서 축제 이름 및 방향이 바뀌는 것이 예사다. 단체장들은 차기 선거에서 '표'가 나올 곳(행사)이 아니면 행사 지원금에 인색한 것이 상식이다. 예산은 세금이 원천이건만 단체장들은 '남는 장사'만 하고 싶은 것이다.

축제장에 나온 김문배 괴산군수에게 '행사 규모와 성격으로 볼 때 이젠 면민의 손에만 맡겨 두기엔 예산 부담이 너무 큰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재작년에 천만원을 시작으로 올해는 천오백만원을 지원하였으나 내년에는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김 군수의 적극적인 답변이다.

a 손에 진흙을 묻히며 직접 그릇을 빚은 축제의 기억은, 저 어린이가 평생 지니고 살 문화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는 환산이 안되는 소중한 가치이다.

손에 진흙을 묻히며 직접 그릇을 빚은 축제의 기억은, 저 어린이가 평생 지니고 살 문화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는 환산이 안되는 소중한 가치이다. ⓒ 곽교신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보는 관 주도의 주민 축제는 지금까지만도 차고 넘친다. 이 날도 '눈치없는 귀빈'들은 들으나마나한 축사를 길게 뽑아 본행사를 기다리는 면민들 등에 땀만 흐르게 했다.

지난 해 전국에서 열린 지자체 축제는 900여개가 넘는다. 거의 대부분의 축제가 억대의 예산 정도는 보통으로 쓰며, 예산을 많이 쓰는 축제일수록 간단히 요기라도 하려면 관람자도 지갑 예산을 많이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집행된 예산, 즉 국민의 혈세가 진정 효율적으로 쓰인 것인지는 의문이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각종 이름의 축제를 바탕부터 재고하자는 논의가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이런 마당에 연풍면에서 자생된 순수한 주민 축제 연풍조령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년에는 예산을 좀 더 많이 지원하겠다는 괴산 군수의 말이 축제 주최권을 욕심내는 말이 아니기를 바라며 참 좋은 주민축제 연풍조령제가 그 초기의 순수함이 계속 이어지기 바란다.

이 축제가 이제껏 그랬듯이 내년에도 연풍청년회의 주도로 순수하게 진행되는지 꼭 지켜보려 한다. 모든 축제의 주인은 주민, 곧 세금을 내는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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