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총각 장가들기 특급대작전

1993년 8월 16일 - 양철지붕 위 두 남녀

등록 2005.08.15 21:57수정 2005.08.16 16:3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대체 서른 자(字)가 뭐기에 여자들이 거들떠도 안 보냐 이거지 내 말은. 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뭐, 부산까지 서있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음악회에 갈 때 팔짱낄 여자들은 항상 있었다니까. 믿거나말거나 전화 한 통이면 5분 대기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득달같이 뛰쳐나올 여자들 명단이 수첩을 펼치면 쭈르륵 쏟아질 정도였지. 안 믿으셔? 잉걸아빠가 대갈장군 소리는 들어도 총각 때 눈빛 하나 장난이 아니었거들랑.


서른이 되자 그 많던 여자들, 똑 떨어지다

a 1993년 11월 13일(토). 아내가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다닌 서울 휘경동 성문교회에서 말 많고 탈 많던 총각시절 정리하며 온 세상을 다 얻고 있는 잉걸아빠.

1993년 11월 13일(토). 아내가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다닌 서울 휘경동 성문교회에서 말 많고 탈 많던 총각시절 정리하며 온 세상을 다 얻고 있는 잉걸아빠. ⓒ 이동환

잉걸아빠는 원래 독신주의자였다. 여자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데 굳이 결혼해서 스스로 족쇄 찰 일은 없다고 늘 생각했다. 젊어서, 아예 철이 안 나서, 원래 싹수가 없어서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다. 쇼펜하우어와 염세주의, 그리고 슈베르트와 절망의 선율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던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서른 고개 들머리까지는 만나는 여자들마다 "너 왜 사니? 그냥 먹고 싸려고 사니? 무슨 여자가 스테이크를 그렇게 게걸스럽게 씹어? 클래식은 좀 듣니? 비탈리는 알아?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그게 얼마짜리 입장권인지 알기나 해? 어떻게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쳐서 망신을 사니?"하며 염병을 떨어댔으니 내가 여자라도 오만 정 다 떨어졌겠다. 지금 내가, 그 당시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며 훈계하고 싶다.

"야, 이 재수 없는 인간아! 먹고 싸는 재미로 살면 좀 안 되냐? 스테이크 게걸스럽게 씹으면 공습경보 울려? 그깟 클래식이 밥 먹여 주냐? 비탈리 모른다고 누가 때려? 악장 사이에 박수 치면 경찰이 잡아가? 뭐, 망신? 에라 이, 반거들충이야. 진짜 유식한 사람은 너처럼 섣부르게 아는 척 안 해 인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금세 나이 먹는다."

어쨌거나 서른이라는 숫자와 함께 나는 사막 한 가운데 휑뎅그렁하게 던져지고 말았다. 외로워지면서 자연스레 자기성찰에 침잠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뒤늦게나마 내가 얼마나 밥 맛 없는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됐지만 넘쳐나던 기차는 다 떠나고 휑하니 역사만 남은 꼴이었다. 그래도 옛정은 남아있겠지 싶어 수첩을 뒤져 몇 명에게 전화 걸면 대기조는커녕 싸늘한 응답들뿐이었다. 예전 이동환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지 버릇 개주니? 달라졌다고? 내가 미쳤니? 너 좋다고 따라다니며 무시당하던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 돋아. 다시는 전화하지 마!"
"왜 전화했어? 또 잘 난 척 하려고? 이제야 내 생각나니? 옆에 있을 때 잘 하지. 끊어!"
"동환씨 전화…, 이제는 받고 싶지 않아요. 상처 따위, 두 번 다시는 싫어요."


이러구러 서른세 살이 되었다(1993년). 오만하던 독신주의는 팽개쳐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얼굴피부는 물론, 몸매까지도 서른 전과는 너무나 달라졌다. 살집도 붙었고 어느새 아저씨 티가 완연했다. 조바심이 났다. 이러다가 두 번 다시는 여자 한 번 만나보지 못하고 인생 끝내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호랑이 새끼 다섯 마리가 품으로 달려들더라는 꿈 얘기를 하셨다.


"봐라. 올해 너 꼭 장가든다. 이 어미 꿈이 좀 용하냐? 아들도 낳을 거야."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1993년 정초부터 여름까지 모두 스물두 명의 여자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열 명은 원정 맞선으로 충남 홍성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찾아다녔다. 주말은 항상 비워두어야 했다. 스물한 번에 걸친 맞선에 실패하고 스물두 번째 만난 여자가 지금 잉걸엄마다.

장가들기 위한 노총각의 눈물겨운 꾀주머니

a 잉걸엄마 처녀 때(홍콩). 잉걸아빠 같은 반거들충이만 안 만났어도 어디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잉걸엄마 처녀 때(홍콩). 잉걸아빠 같은 반거들충이만 안 만났어도 어디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이동환

1993년 7월 30일(금) 오후 6시. 서울 남영동 전철역 앞 '생활 속에서'라는 카페에서 잉걸엄마를 처음 만났다(몇 년 전 아쉽게도 문 닫았더군).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주스 한 잔을 마시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갑자기 심드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거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스물한 번이나 맞선에 실패한 끝이라 지친 탓도 있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맞선 따위 안 볼 거야. 이 정도면 어머니 체면 세워드린 셈이니까.

6시 정각. 삐걱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부러 눈을 감았다. 서른 셋 나랑 동갑인 노처녀, 무역회사에 근무하며 외국 바이어들과 상담역이었다고 하니 꽤 도도할 듯싶었다. 그래, 날도 더운데 적당히 몇 마디 하다가 끝내자. 뭐, 그런 생각을 막 굳히고 있었다.

"저…, 이… 동환씨 되세요?"
"아, 심경애씨?"


시원한 물색 투피스에 짙지 않은 화장. 흔한 귀고리는커녕 장신구와는 아예 담쌓고 사는 모양새. 이십대라고 해도 주억거릴 만큼 어려보이는 얼굴. 바이어들을 상대하던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하고 단아한 분위기. 딱, 내가 찾던 '스타일'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말을 붙여보니 속이 꽉 찬 여자였다. 이 여자다 싶었다. 눈치를 살피니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네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맥주까지 시켜 마시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잔을 부딪쳤다.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간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서른 전까지만 해도 연애꾼이었는데 그 정도쯤이야. 네 시간 동안 내내, 절대 딴 생각 못하게끔 예의 그 눈빛으로 못을 박아버렸다. 내게 호감이 있는 모양인데 나도 마찬가지, 좋다. 오늘 확실하게 나를 각인시켜주마!

밤 10시. 밖에 나오니 소나기가 한줄기 지나간 듯 보도블록이 젖어있었다. 755번 좌석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으며 나는 부러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참 느끼한 몇 마디를 툭 던졌다.

"여름밤이라 그런지 너무 짧네요. 차 타시기 전에 말씀드릴 게요. 또 만나고 싶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뭔가 막 드리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요. 좌석버스푭니다. 지금은 이것밖에 못 드리지만 연이 닿는다면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처절한 줄다리기, 그리고 8월 16일

a 괌에서 꿈같았던 신혼여행. 5박 6일 동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왔다. 가이드 말로는 자기가 본 신혼부부 가운데 가장 닭살 돋는 커플이었단다.

괌에서 꿈같았던 신혼여행. 5박 6일 동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왔다. 가이드 말로는 자기가 본 신혼부부 가운데 가장 닭살 돋는 커플이었단다. ⓒ 이동환

어쨌거나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 한잠도 잘 수 없었다. 아내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절대 딴 생각 못하게 허리춤을 동여맬까. 어떻게 해야 해 넘기기 전에 이 여자에게 장가들까. 밤새 뒤척이며 결국 방법이랍시고 하나 떠올렸다.

"그래, 전화하지 말자. 저쪽에서 애 닳아 전화할 때까지!"

모험이었다. 아니, 위험한 방법이었다. 금세 전화할 것처럼 너스레를 떨어놓고 연락 안 한다면 필시 그대로 끝날 일. 저쪽도 자존심이 있는데 먼저 전화할 일은 없다. 그러나 먼저 전화가 온다면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다. 식만 올리면 되는 일이란 말이지. 그런데 만약에 전화가 안 온다면? 이대로 끝나버린다면? 아냐, 그럴 리 없어! 그 눈빛 봤잖아. 분명히 내 안에 갇혔어, 갇혔다고! 반드시 전화 올 거야, 아무렴!

하루가고 이틀가고, 자신은 있었지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혹시나 이대로? 하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더 늦기 전에 전화해? 말아? 나는 술밥 담은 방구리가 못 미더운 쥐새끼마냥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일주일을 넘긴다면 상황은 끝이지 싶었다. 노처녀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 간과한 듯도 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좋다. 한 번 해보자. 이왕 시작한 일. 칼을 뽑았으면 하다못해 썩은 무청이라도 싹둑, 베어야 할 것 아닌가. 만에 하나라도 전화가 안 온다면? 그렇다면? 그래 까짓,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역사적(?)인 1993년 8월 16일(월). 처음 만나고 17일이 지나 결국 전화가 걸려왔다. 일종의 항복이었다.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애써 침착했다. 엉덩이는 벌써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전화…, 하신다더니."
"아, 미안합니다. 너무 급한 일들 때문에 그만 깜빡."
"깜빡하실 정도로 그날 그 말씀들, 가벼웠나요?"
"그럴 리가요. 정말 미안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 게요.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대신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상황 종료. 꽤 긴 통화를 끝내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보름이 넘도록 마음 졸였던 줄다리기가 끝이 나자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세상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이동환이 장가가게 됐답니다. 삼팔따라지 외아들이, 일가붙이 하나 없는 천애 고아나 마찬가지 노총각 이동환이, 드디어 장가가게 생겼다고요. 아 이거, 국경일 삼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처음 만난 날로부터 정확하게 105일째 되던 1993년 11월 13일(토) 오후 3시. 나는 서울 휘경동 성문교회에서 노총각 딱지를 떼어내고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밤 얘기까지 써? 말아? 에이 참자!

반전드라마처럼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온 힘을 기울인 특급작전을 승리로 마감하고 이러구러 지금 나는 행복에 겨운 사십대 중반이 되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누군들 그렇게 살지 않나? 어쨌거나 돌아보면 참 꿈같다.

"당신, 우리 얘기 결국 쓰는 거예요?"
"당연하지!"
"아이 참, 얼굴 들고 못 다니겠네. 그렇게 다 팔아버리면 학부모들이 봐도 그렇고, 학생들이 보면 더욱…, 이이가 정말 나더러 어쩌라고…."
"내 사랑 심경애를 이렇게 얻었노라, 만 천하에 공표하고 싶어 그런다, 왜? 팔불출에 푼수 소리 들으면 어때? 내가 좋아 죽겠다는데."

덧붙이는 글 | 6·25 전쟁이 끝나고 남한 땅에 실향민으로 각자 홀로 남겨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아버지 고향 선배 중매로 만났답니다. 어머니는 중림동에 살며 고무신공장에 다니셨고 아버지는 용산구 갈월동에 살며 미군부대 목수로 일을 하셨다지요. 처음 만난 날 헤어지며 전차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동전 두 닢을 주시더랍니다(50 년 전 이야기).

"이거 받기요. 지금은 드릴 게 이것밖에 없슴둥. 허나 인연이라면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드리갔소. 믿어 보기요."

웃으면 복이 오고 찡그리면 우환이 온다지요? 요즈막 잉걸아빠는 양미간에 오랜 세월 굳어진 내천(川)자를 지우려고 ‘웃음연습’을 한답니다. 효과 만점입니다. 학생들에게도 허구한 날 웃기 연습을 시킵니다. 요샛말로 인생 뭐 있나요?

덧붙이는 글 6·25 전쟁이 끝나고 남한 땅에 실향민으로 각자 홀로 남겨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아버지 고향 선배 중매로 만났답니다. 어머니는 중림동에 살며 고무신공장에 다니셨고 아버지는 용산구 갈월동에 살며 미군부대 목수로 일을 하셨다지요. 처음 만난 날 헤어지며 전차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동전 두 닢을 주시더랍니다(50 년 전 이야기).

"이거 받기요. 지금은 드릴 게 이것밖에 없슴둥. 허나 인연이라면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드리갔소. 믿어 보기요."

웃으면 복이 오고 찡그리면 우환이 온다지요? 요즈막 잉걸아빠는 양미간에 오랜 세월 굳어진 내천(川)자를 지우려고 ‘웃음연습’을 한답니다. 효과 만점입니다. 학생들에게도 허구한 날 웃기 연습을 시킵니다. 요샛말로 인생 뭐 있나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4. 4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5. 5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