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이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 예쁜 것들을 외면하고 잔소리만 해댔으니...

등록 2005.08.16 12:09수정 2005.08.1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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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집을 나서는 딸아이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김밥과 간식거리가 든 가방이 무거울 법도 한데 아이의 어깨는 콧노래에 맞춰 연신 들썩거리고 있었다. 물통을 들고 이리저리 빙빙 돌리는 아이의 손짓들이 참 행복해 보였다.


아침부터 아이가 이렇게 신바람이 난 건 선유도 공원으로 견학을 가기 때문이다. 아이의 어린이집에선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견학을 간다. 그때마다 아이의 아침은 더없이 행복하다. 하지만 난 걱정이 앞섰다. 따가운 아침 햇살로 보아 한낮 더위가 어떨지 이미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날씨가 덥건 춥건 그저 어디를 간다면 하늘로 솟아오를 듯이 팔짝팔짝 뜀박질을 해대는 건 비단 우리 집 아이뿐만은 아닐 것이다. 무작정 내달리는 아이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복희야! 과자 먹고 나면 빈 봉지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가방에 넣어 놓은 비닐봉지에다 담으라고 했어요."
"그래 맞았어. 쓰레기는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알지?"
"네. 어? 엄마 저기 좀 봐요!"
"뭐?"

김정혜
아이가 가리킨 곳엔 보랏빛 나팔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분홍색 나팔꽃은 자주 보았지만 보랏빛 나팔꽃은 나도 처음인지라 어찌나 예쁘던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꽃 가까이로 다가갔다.

김정혜
"엄마! 이게 무슨 꽃이에요?"
"응. 나팔꽃. 꼭 나팔을 닮았잖아. 그렇지?"


김정혜
김정혜
그러고 보니 길가엔 나팔꽃만이 아니었다. 이웃집 물탱크 위의 수세미 꽃도 보였다. 수세미 꽃은 바로 옆 컨테이너를 건너 수세미 꽃 다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김정혜
김정혜
그 아래쪽으로 즐비하게 피어 있는 호박꽃, 또 다른 이름모를 꽃들이 군데군데 소복하게 피어 있었다.


참 이상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늘 오가는 길. 그런데 왜 이 예쁜 꽃들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이에게 아침마다 늘 똑같은 잔소리를 하느라 그것들을 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복희야! 어린이집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밥 먹을 땐 반찬 골고루 먹고 어린이집 차 타고 내릴 때 선생님께 인사 잘 하고….'

집에서 어린이집 차가 정차하는 곳까지의 거리는 약 500m. 이 500m의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늘 똑같은 잔소리를 아침마다 아이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대느라 바빴다. 나는 잔소리를 하느라 아이는 귀에 딱지가 앉느라 저렇듯 예쁜 꽃들이 나나 아이의 눈에는 비치지 않았나보다.

김정혜

김정혜

오늘 아침. 나는 들었다. 소박해서 더 예쁜 나팔꽃이 '안녕하세요?'하며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한없이 뻗쳐 올라가는 노란 수세미 꽃이 '우리, 아침마다 반갑게 인사해요'하는 소리를.

그들은 아침마다 나와 아이를 기다렸을 것이다. 반갑게 다가와 상냥하게 인사해주기를. 하지만 그들은 아침마다 아이에게 해대는 나의 잔소리만을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보다 못한 그들은 아이의 눈을 빌려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아팠다. 꽃을 바라보는 아이의 맑고 고운 눈망울이 내 메마른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쳤기 때문이다.

이 아침. 너무 소박하고 흔해서 그렇기에 오히려 더 예쁜 그것들을 무심하게 외면해 버렸던 나를 깊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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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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