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불어라! 대추야, 떨어져라!"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등록 2005.08.22 23:35수정 2005.08.23 17: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 7월부터 토요일 휴무제가 시행되면서 나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매주 외출을 하기도 마뜩찮아서 이번 주는 아예 컴퓨터를 안고 뒹굴고 있습니다. 아이들 방학도 거의 끝나 가는데, 지난 일요일처럼 영화를 보거나 외식이라도 하자는 표정을 짓지만 나는 애써 무시합니다.


그런데 전화가 왔습니다.

“도련님! 촌에 형님들 하고 누나들 다 왔는데, 먹을 것이 없네요. 삼겹살 서너 근 사서, 빨리 오세요!”

막내형수님의 맑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집니다.

“다른 것은 준비할 것이 없는가요?”

나는 쭈뼛거리며 아내를 흘깃 쳐다봅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저 웃기만 합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삼겹살과 콩나물을 샀습니다.


6·25때 ‘박’이 어머니를 놀라게 한 사연

형님 세 분은 논에서 농약을 치고 계십니다. 막내인 나는 농사일에서만큼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개비(어정잡이)인지라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농약을 친 후 우리는 비가 와서 제법 불어난 개울에서 목욕을 하며 오랜만에 이런 저런 걱정들을 나눕니다. 집을 들어서는데 하얀 박꽃머리에 작은 박이 붙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박을 따서 나물을 해 주기도 했지만, 나는 적당히 여문 박을 삶아서 바가지를 탈 때 나온 박속무침을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숟가락으로 긁어낸 하얀 박속을 초고추장과 버무렸는데, 발그레한 빛깔이며 혀에 착착 감겨드는 부드러운 감촉하며, 살짝 씹으면서 꿀꺽 삼키면 목을 간질이는 알싸한 맛이라니!

a 서러운 박꽃

서러운 박꽃 ⓒ 한성수

“엄니, 박꽃이 참 예쁘네요. 갑자기 박속 초무침이 먹고 싶네요.”
“그래, 박이야기 들어 볼래? 6.25동란 때 우리 식구들도 김해로 피난을 갔다가 보름달이 뜬 늦가을 밤에 집에 돌아 왔단다. 내가 제일 먼저 집에 들어섰는데, 집은 새까맣게 불이 타서 없어지고, 마당에 허연 해골들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거야. 저 불쌍한 시체들은 다 어쩌지. 나는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대문간에서 오돌 오돌 떨고 있는데, 뒤늦게야 네 아버지가 와서 살펴보았지. 그런데 그것들이 다 우리 초가집 지붕에서 익은 박이 불에 타서 떨어진 것이었단다. 얼마나 놀랐던지….”

“맞습니다. 그때 우리도 참 많이 놀랐습니다.”

큰형님과 작은형님도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서 달빛을 받은 하이얀 박꽃이 더 서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바람아, 불어라! 대꾸(대추)야, 떨어져라!"

우리 고향집엔 대문이 없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가시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삽짝이 있었으나 낡아서 없어진 지도 3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대문이 있던 자리 옆에다 작은형님이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올해는 실하게 많이 열렸습니다. 추석을 조금 남겨둔 이맘때쯤 우리는 대추 한 톨을 먹고 싶어 목을 길게 늘어뜨리곤 했었지요. 그런데 기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큰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a 대추야, 떨어져라!

대추야, 떨어져라! ⓒ 한성수


"바람아, 불어라! 대꾸(대추)야, 떨어져라!"
"할배, 할배, 잡수이소."
"오냐! 에헴, 톨! 톨!"

더 많은 대추가 떨어지길 바라며, 우리는 온 동네를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습니다. 어른들은 수확을 앞둔 벼가 걱정이 되는 터라, ‘쯧’ ‘쯧’ 혀를 차곤 했습니다.

덜 익은 감을 주워 홍시를 만들어 먹던 그 시절

바람이 불면 좋은 일이 또 있었습니다. 무언가 주전부리를 쳐야할 나이에 먹을 것이 없던 그 때,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분 다음 날, 나는 다른 아이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채 떨어지지 않은 눈을 부비며 감나무 밑을 살금살금 다니면서 떨 감을 주웠습니다. 더러 온전한 놈도 있었지만 대개는 떨어지면서 상처가 났었지요.

그놈들을 하얀 러닝셔츠의 한 귀퉁이는 입으로 물고 다른 귀퉁이는 왼손으로 잡고, 부지런히 감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불룩하게 배불뚝이가 된 그 포만감이라니! 동무와 우연히 감나무 밑에서 만나면 떨어져서 며칠이 지난 홍시를 반으로 쪼개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혹 떨떠름한 감을 입에 넣었다가는 서둘러 ‘퉤’ ‘퉤’ 뱉고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지요.

덜 익은 놈들을 홍시가 될 때까지 그늘에 올망졸망 열을 지어 세워놓기도 하고, 더러 아무도 모르는 시냇가에 웅덩이를 만들어 담가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물에 넣어둔 놈(담은 감)은 신기하게도 하루나 이틀이면 떫은맛은 사라지고 달짝지근한 맛이 들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하얀 러닝셔츠가 감물이 들어 알록달록 변하면 엄니의 혀 차는 소리도 커져만 갔습니다.

a 감에 앉은 대추벌!

감에 앉은 대추벌! ⓒ 한성수

집 앞 길가에 반시가 여러 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길가에 한참동안 쪼그리고 앉아 옛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감 사이에서 대추벌(말벌과 같은 종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릴 적 우리는 대꾸벌이라고 불렀음)이 쏘옥 고개를 내밉니다. 벌은 이리저리 부산하게 다니더니 마침내, 감의 깨어진 부분에 머리를 처박습니다.

“막내는 지금 밥 안 먹고 어디 갔냐? 성수야!”

여든 일곱, 어머니가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집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4. 4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5. 5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