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이건희 회장이 사는 길

[곽정수 칼럼]

등록 2005.08.23 11:41수정 2005.08.2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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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8월 17일 저녁 삼성본관 앞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노동·인권탄압, 정경유착, 경제파탄 주범 책임자 처벌을 위한 촛불문화제'.

지난 8월 17일 저녁 삼성본관 앞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노동·인권탄압, 정경유착, 경제파탄 주범 책임자 처벌을 위한 촛불문화제'. ⓒ 허지웅

"정말 삼성을 죽이려는가!"

지난 8월 17일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 앞에서 촛불시위가 열리던 날, 이를 지켜보던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고위임원이 격앙된 목소리로 던진 말이다. 15만 삼성인들로서는 정말 당혹스런 날이었음에 틀림없다. 수백명의 시민들은 그날 X파일 전면 공개 및 이건희 회장 구속처벌을 촉구하는 ‘촛불 문화제’를 가졌다. 그에 앞서 전국 108개 시민사회단체는 삼성 불법 뇌물공여 사건 및 불법 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촛불시위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 월드컵 승리를 위한 붉은 악마들의 집회,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여중생을 위한 추모시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한국사회에서 촛불시위는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획을 가르는 큰 고비 때마다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숭고한 대의를 내걸고 시민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기폭제’로 승화됐다.

"그렇다면 정말 삼성이 공공의 적이란 말인가!"
삼성 구조본 고위 임원의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분노가 섞여있다.

촛불시위와 삼성 구조본 임원의 분노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삼성의 경영이 이번 X파일 사건으로 흔들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기업으로서의 삼성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 삼성이 우리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이유를 잘 말해준다. 한국 전체 수출의 22%, 국세의 8~10%,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23%, 10대그룹 전체 매출의 30%, 이익의 35% 등등.

문제는 역시 삼성의 지배구조이다. 삼성이 순수 경영활동과 관련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이 얼마나 되던가? 여론의 지탄을 받는 삼성의 행위들 대부분은 황제경영과 세습경영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적 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 세금없는 대물림이나 폭력적인 무노조경영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권에 주는 불법자금이나 검찰에 대한 ‘떡값’도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총수 1인 지배구조를 위한 일종의 ‘체제유지 비용’이다. 막강한 자본력과 인적 네트웍, 정보망을 동원해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까지 자신들 입맛대로 재단하는 삼성공화국의 폐해도 ‘비민주적’ 황제경영의 확장이다.


그것은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시점에 와있다. 촛불시위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는 불과 수백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촛불시위의 시작도 항상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시대의 흐름을 바꾸었다. 삼성 앞 촛불이 언제 수만, 수십만개로 불어날지 모른다. 삼성의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항상 화약고를 짊어지고 있는 꼴이다.

하지만 삼성의 반응은 아직 실망스럽다.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 극소수 언론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 삼성 구조본 간부의 말에서는 안이함마저 느껴진다.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삼성을 좋게 본다는 응답이 항상 다수이다. ‘삼성공화국’ 논란이 최고점에 달했던 때에도 삼성에 대한 호감도는 50%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삼성으로서는 엄청난 자산이다. 그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초일류기업 삼성이 당연히 누려야 할 몫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삼성공화국에 대한 우려, 세금없는 대물림에 대한 비판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위기의 삼성, 해법은 지배구조 개선

a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과 삼성생명 등 삼성계열사의 빌딩이 밀집한 지역.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과 삼성생명 등 삼성계열사의 빌딩이 밀집한 지역.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럼 삼성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지배구조의 개선이다. 그 출발은 황제경영의 전위대, 삼성공화국의 청와대로서 온갖 삼성 불법행위에 연루된 구조조정본부부터 과감히 수술하는 일이다. 구조본 개편의 핵심은 그 권한에 맞게 법적 책임과 의무를 명확히 지도록 하는 것이다. 구조본을 법적 실체가 있는 조직으로 바꾸어야 한다. 엘지와 같은 지주회사 체제이든, 에스케이와 같은 이사회 산하 기구이든, 선택은 삼성의 몫이다. 자금조달과 활동내역이 베일에 싸여있는 유령조직같은 현재의 운용방식은 더 이상 안된다. 투명경영을 이뤄야 한다. 또 절대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무책임경영’도 더 이상 존속돼서는 안된다. 이건희 회장 스스로 지난해 6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출 수 있도록 구조본을 투명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연장선에서 구조본의 인적 쇄신도 검토돼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미 수차례에 걸쳐 불법행위에 연루된 구조본 고위 임원들부터 스스로 용퇴하는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누가 멸사봉공하겠는가” “워낙 민감한 비밀을 많이 알고 있어, 이건희 회장도 함부로 내치기 어려울 것이다” 삼성 안에서도 별별 소리가 많지만, 무엇이 수십년간 몸담아온 삼성을 살리는 길인지 생각할 때이다. 법과 윤리의 준수를 제일의 덕목으로 내세운 ‘삼성 경영원칙’을 기준으로 봐도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삼성 지배구조의 개선은 궁극적으로 총수일가가 최고 의사결정권과 이익을 사실상 독점하는 황제경영체제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구조본이 삼성전자 산하 회장실로 들어가고, 책임자들의 얼굴이 바뀌어도, 황제경영 체제가 유지되는 한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비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으로서는 결국 이건희 회장이 물러나고, 삼성을 해체하라는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제경영제체의 개혁은 이건희 퇴진론이나 삼성 해체론과는 다르다. 삼성의 해법은 궁극적으로 삼성과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 이롭고, 한국사회에도 이로운 ‘상생’의 접근이어야 한다. 극소수 비판론자들만 침묵하면 아무 문제가 없고, 이 고비만 넘기면 다시 태평성대가 찾아온다는 삼성의 인식이 비이성적이듯, 즉각적인 이건희 퇴진과 삼성 해체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진보와 개혁진영에서도 80, 90년대식 재벌해체를 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건희 회장의 사법처리 주장이 엄연이 존재한다. 불법을 저지른 자는 재산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 정신이다. 그런 점에서 사법당국의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성찰없이 참된 미래가 열리지 않듯이, 과거에 매몰돼 발목이 잡혀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X파일 사건의 진정한 성과는 한국사회와 삼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을 법정에 세우더라도 새로운 미래를 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회성 ‘한풀이’에 불과하다.

관건은 새로운 삼성을 열어가는데 이건희 회장 일가의 역할이다. 자신들의 운명과 삼성의 미래가 걸리고, 한국경제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룰 수 있는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항아리를 깨뜨린 사마광의 지혜를 배워라

a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북송시대 정치자이자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 물이 가득 찬 항아리 위에서 놀던 아이가 그만 항아리에 속에 빠진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어른 키보다 큰 항아리였기에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구르던 상황에서 사마광은 주저없이 돌을 들어 항아리를 깼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만약 사마광이 항아리를 깰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였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이는 리더가 내리는 결단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경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국의 피터 드러커는 글로벌 경쟁시대의 경영자의 핵심역할을 ‘어떻게 변화를 주도하고 미래를 창조할 것인가’로 요약한다. 유능한 경영자, 위대한 리더는 조직에게 필요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미 삼성의 변화를 이끌어내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이 있다. 1994년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신경영의 요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회장은 종래 양 위주의 경영관행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질 위주의 경영으로 나가자며, 나부터 변하자고 역설했다. 그것은 오늘날 초일류기업 삼성의 토대가 됐다. 이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10년 뒤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고민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끊임없는 주문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은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여망을 똑바로 봐야 한다. 아니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야 한다. 그러면 국민의 박수와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다. 삼성 경영의 강점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다. 삼성 안에서도 이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a 곽정수 기자.

곽정수 기자.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10여년 전 이건희 회장이 해냈듯이, 아들인 이재용 상무가 항아리를 깨는 결단으로 새로운 삼성을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그림은 총수 1인 지배체제의 존속이나, 총수의 퇴진과 재벌해체라는 극단적 선택이 아니면서도 현재의 모순을 깨는 창조적 발상이어야 성공확률이 높다. 그것을 찾아낸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형처럼 새겨진 세금없는 대물림이라는 ‘주홍글씨’를 벗겨내는 계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면 국민들의 촛불시위는 갈수록 확산될 것이고,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간삼간 태우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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