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아름다운 산하가 있으랴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기(11) 백두산 삼지연 가는 길

등록 2005.08.24 01:45수정 2005.09.1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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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 가는 길 ⓒ 박도

"걸상 띠를 매십시오"

11시10분, 평양공항에서 삼지연 행 고려항공 JS 5201편 자리표를 받아 검표한 뒤 버스를 타고 활주로에 있는 고려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기내는 몹시 좁은데다가 배치가 촘촘해서 매우 불편했다. 거기다가 연료를 아끼느라 냉방을 하지 않아서 무척 더웠다. 자리에 앉은 뒤 앞자리에 있는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해도 실내 기온이 높은지라 별 효과가 없었다. 하기는 우리도 20~30년 전에는 그랬다.


a 아담한 삼지연 공항청사

아담한 삼지연 공항청사 ⓒ 박도

도를 닦는 기분으로 앉아서 승무원이 주는 <로동신문>을 펼쳤다. 분명 주체94(2005)년 7월 22일자 신문이었는데, 이틀 전에 본 20일자 신문을 보는 듯 했다. 1면 머리기사의 제목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께서 조선인민군 제0000군 부대를 시찰하시었다'에서 부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기사 본문도 대체로 비슷했다(돌아오는 날인 25일자 <로동신문>도 비슷했다). 체제의 차이일 테지만 아마 남쪽에서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신문을 사흘동안 찍어내면 독자들 대부분이 신문을 끊어서 신문사는 문을 닫지 않을는지.

11시40분, 마침내 비행기가 움직였다. 기내에는 '걸상 띠를 매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지만 기내 방송은 "안전띠를 매십시오"라고 방송했다. 시동을 걸자 찬 바람이 나와견딜 만했다.

a 삼지연 공항 언저리의 이깔나무들

삼지연 공항 언저리의 이깔나무들 ⓒ 박도

"평양에서 삼지연까지는 505km로서 1시간 10분 걸립니다. 우리 비행기는 5700m 높이에 시속 600km로 날고 있습니다."

상냥한 기내 방송이었다. 이 날도 내 자리는 창가가 아니라서 북녘 땅을 굽어보고 싶은 생각은 접어야 했다. 오늘 점심은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본 궤도에 오르자 곧 도시락(곽밥)을 나눠주었다.


뚜껑을 열자 보기에도 먹음직하고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이 보였다. 그동안 끼니마다 느낀 것이지만 북녘 음식은 아주 맛깔스러웠다. 우선 음식이 느끼하지가 않았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은 듯 맛이 담박하고 아주 깊이가 있었다.

마치 내 어린시절 다섯 고모님 가운데 둘째 고모님이 일찍 고모부를 여의고 어렵게 살았는데, 그 고모 댁에서 밥을 먹으면 가장 맛있었다. 쌀을 아낀다고 조밥이나 보리밥에 맨 간장, 된장찌개를 먹어도 이상하게 참 맛이 있었다.


기내에서는 밥풀 한 알 남기지 않고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뜰히 그릇을 비웠다.

이깔나무 군락지

12시50분, 식사를 마치고 북녘에서는 귀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사이 비행기는 삼지연 공항 활주로에 내렸다. 활주로 포장상태가 좋지 않아 착륙이 매끄럽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위도도 고도도 높은 고산지대라 평양과는 달리 날씨가 아주 시원했다. 깊은 삼림지대에 있는 비행장이라 공항청사도 아주 오래된 듯 작고 아담했다. 일대가 온통 이깔나무 군락지로 장관이었다.

곧 20여 인승의 중형버스를 타고 숙소인 배개봉호텔로 달렸다. 길은 포장도로였으나 오래동안 보수를 하지 않아서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내가 탄 차는 4호차로 앞차와 200~300m 틈을 뒀지만 아무래도 먼지와 매연이 빨려 들었다. 길섶 좌우의 이깔나무들이 쭉쭉 잘 뻗었다.

a 삼지연 가는 길, 앞차가 일으킨 먼지와 매연이 뿌옇다.

삼지연 가는 길, 앞차가 일으킨 먼지와 매연이 뿌옇다. ⓒ 박도

나는 차창 밖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이전에 지나쳤던 연길~청산리~백두산 길과 백산~무송~백두산 길 등 세 길을 견주어 보았다.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였으나 장엄한 맛은 내 조국으로 오르는 길이 더 좋았다.

13시30분, 버스는 계속 달리는데 이따금 숲길의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얼굴들이 하나같이 그을려 까맣다. 주민들도 군인들도 산길에서 드문드문 일을 하거나 지나가다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모두들 산사람으로 순박해 보였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차를 세우고 그들에게 다가가 얼싸안아 주고 싶었다.

곧 삼지연 별장지대가 나타났다. 지붕 색깔이 무척 화려하다. 마치 알프스의 어느 별장지대인 양 아름답기 그지없다. 통일 후 이곳에 휴양지를 만든다면 여름철 피서지로 최적지가 될 듯하다. 내 조국에 이런 휴양지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게 무척 아쉬웠다. 옆자리 심기섭 안내원이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느냐고 물었다. 내가 여러 장 찍어야 쓸만한 사진이 나오고 남쪽으로 돌아간 뒤 신문에 올릴 거라고 하자, 기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내가 완전히 취재 대상이겠구먼"하고서는 씩 웃었다. 남쪽에서나 해외에서 방문단이 오면 내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이따금 옷이나 갈아입고 문패나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온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a 곤달비꽃

곤달비꽃 ⓒ 박도

소담스런 노란 곤달비꽃

다시 산길을 달리자 '백두산 밀영 26km'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버스는 계속 깊은 산속을 헤집고 달리는데 '산불조심'이라는 팻말이 자주 눈에 띄어서 마치 내가 사는 강원도 산골마을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a 하모니카를 부는 김창규씨

하모니카를 부는 김창규씨 ⓒ 박도

시인 김창규씨가 무료했는지 하모니카를 꺼내 '오빠생각' '고향의 봄' '나그네설움' '하숙생' 등을 멋들어지게 뽑았다. 순간 이 곳이 분단된 북녘 땅이라는 생각은 싹 달아나고 마치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김창규씨는 제 멋에 취하였음인지 즉석시도 한 수 읊었다.

"백두산은 내 생애 처음 가는 곳 /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 민족의 작가들이 백두산에 모인다 / 아! 지난날 관의 행군과 식민지배와 외세의 간섭으로 / 만나지 못한 길고 긴 세월 / 우리 이제 한 민족 한 핏줄로 이어져 만났으니 / 백두산 상봉에 우리들 영원한 깃발이여 / ………."

a 잠시 비를 피하면서(왼쪽부터 북측 오영재 시인, 필자, 북측 관리인, 안내원)

잠시 비를 피하면서(왼쪽부터 북측 오영재 시인, 필자, 북측 관리인, 안내원) ⓒ 박도

14시05분, 산중 날씨는 변화무쌍하다더니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버스 천장 문으로 비가 쏟아져 문을 닫았다. 비가 오자 길에서 먼지가 나지 않아 좋았다. 소설가 김영현씨가 하모니카를 이어받아 계속 노래는 이어지고 버스는 빗속을 달렸다.

14시30분, 오랜 여정 끝에 백두산 밀영 주차장에 닿았다. 비는 사납게 쏟아졌다. 마침 취재가방 주머니에서 비상용 우의를 꺼냈다. 모자까지 펼치고 뒤집어썼더니 견딜만했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잠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가랑비에는 개의치 않고 언저리 사진을 찍었다. 곰치 어수리 등 고산식물들이 제멋대로 자랐다. 노란 곤달비꽃이 소담스러웠다. 나는 북녘 조국 땅을 둘러보면서 조국의 미래는 무척 밝다고 확신했는데, 무엇보다 아름다운 산하와 오염되지 않은 국토가 보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디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산하가 있으랴.

a 야생화가 예뻐서 이름을 물었더니 '어수리'라고 하였다.

야생화가 예뻐서 이름을 물었더니 '어수리'라고 하였다. ⓒ 박도

a 백두산 밀영 아래로 흐르는 소백수 개울

백두산 밀영 아래로 흐르는 소백수 개울 ⓒ 박도

a 밀영으로 가는 숲길

밀영으로 가는 숲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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