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요새 백두산 밀영에 가다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기(12) 백두산 삼지연 밀영

등록 2005.08.27 15:50수정 2005.08.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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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두산 삼지연 귀틀집 밀영으로 유격대원들의 병영이었다.

백두산 삼지연 귀틀집 밀영으로 유격대원들의 병영이었다. ⓒ 박도

독립군의 요새

a 밀영 언저리의 삼림

밀영 언저리의 삼림 ⓒ 박도

백두산 일대는 구한말 이래 항일 전적지로, 독립군 전사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땅이다. 일찍이 구한말 백두산 포수 홍범도 의병대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까지 숱한 항일 전사들이 일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운 해방 공간이었다.


이 일대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울창한 삼림으로 유격전술을 펼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좋았고, 또한 이 부근에는 일제의 식민지 약탈로 말미암아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온 반일감정이 높은 우리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들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대 산악은 백무고원, 개마고원, 낭림산맥으로 이어져 무장투쟁 범위를 국내로 확대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백두산 일대의 항일전적지로 갑산· 삼수· 봉오동· 청산리· 무송· 홍두산· 마안산· 내두산· 보천보 · 삼지연 · 무산 지구 등 수많은 밀영들이 당시에는 독립군의 요새로 국내 진격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a 밀영 내부

밀영 내부 ⓒ 박도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항일무장 투쟁사를 안고 있는 역사의 산으로, 수많은 항일투사를 길러낸 보금자리였다. 그러므로 백두산 일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위 하나에도 독립 전사들의 피 어린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는 항일 유적지다.

나는 1999년, 2004년 두 차례 항일유적 답사 차 중국으로 백두산에 올랐으나 내 조국 백두산을 지척에 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산한 적이 있었다. 그 언제 내 조국 땅을 밟으면서 항일유격대원들의 밀영을 둘러보면서 장군봉에 올라 천지를 바라볼 수 있을까 몽매에도 그리던 가운데 이번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로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백두산 밀영의 귀틀집


a 유격대원 복장의 안내원

유격대원 복장의 안내원 ⓒ 박도

15:00, 고산지대는 일기변화가 무쌍하다고 하더니, 하늘은 언제 비를 쏟은 양 우거진 삼림 사이로 금세 활짝 웃었다.

‘여우비’였다. 지난날 유격대 복장을 그대로 입은 안내원이 귀틀집인 백두산 밀영으로 안내했다. 언저리는 온통 우거진 삼림으로 밀영들은 천연요새였다.


밀영들은 유격대원의 병영, 무기수리소, 재봉소, 병원, 출판소, 연락소 등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듯 보였다. 사령부 안에는 김일성 김정숙 내외와 아들 김정일 소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유격대원 병영 안 머리맡에는 소총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병영 안에 곳곳에는 가재도구들과 다음의 글들이 붙어 있었다.

“모두 다 조선혁명의 심장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모두 다 공부하자 지식은 황금보다 유력하다”
“우리는 항일주력군 조선혁명 책임진 자각 잊지 말자”


a 정일봉

정일봉 ⓒ 박도

밀영 언저리가 온통 이깔나무 숲으로 뒤덮였다. 공기가 더 없이 상쾌하였다. 만성 호흡기 질환자도 이곳에서 며칠만 쉬어도 저절로 나을 듯, 휴양지로는 최적지였다.

안내원은 밀영 뒷산 봉우리 ‘정일봉’을 진지하게 설명하였다. “이곳은 백두산 정기를 타고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산봉우리를 정일봉으로 이름 지은 바, 그 글씨는 216(2. 16생일) 톤의 바위덩어리를 옮겨다가 새겨서 붙였는데, 새긴 글씨의 깊이가 60~100 센티미터”라고 하였다.

대부분 회원들은 별 표정 없이 감정을 자제한 채 듣기만 하였고, 한 회원은 저렇게 무거운 바위덩어리를 어떻게 옮겨다가 글씨를 새겨 산봉우리에 붙였는지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다소 불편한 심기를 돌려서 말하였다.

베개봉호텔

a 막우물과 소백수 개울물

막우물과 소백수 개울물 ⓒ 박도

내려오는 길에 소백수가 흐르는 개울 옆에 지난날 유격대원들의 우물에 들렀다. 안내원은 이곳 물을 마시면 10년은 더 젊어진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갈증도 나던 가운데 조랑바가지로 한 쪽자 떠서 마시자 물맛도 좋거니와 간장까지 서늘하였다.

15: 40, 삼지연 밀영을 출발하여 숙소인 베개봉호텔로 향했다. 그 일대는 고산지대의 귀공자인 자작나무 숲이 많았다. 나는 줄기가 흰 나무는 모두 다 자작나무로 알았는데, 자작나무는 두 가지 종류로 더 미끈한 것은 일명 ‘봇나무’라고 하였다. 이 나무들은 매우 기름져서 그 껍질은 비가 오는 날에도 탈 정도여서 지난날 유격대원들이 일기가 궂은 날 화목으로 많이 썼다고 하였다.

북녘의 오염되지 않는 산하를 보면서 내가 “북녘땅은 통일 후 조국의 큰 자산”이라고 말하자, 곁에서 심기섭 안내원이 그 말을 받아서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산다”라는 수령님의 말씀이라며 전하였다.

a 베개봉 호텔

베개봉 호텔 ⓒ 박도

16: 20, 긴 여로 끝에 양강도 삼지연군 삼지연읍 베개봉호텔에 닿았다. 앞산의 모양새가 베개 같다고 하여 '베개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산중 호텔로 아주 아담하고 예뻤다. 우리가 도착하자 한 무리의 단체가 우리가 타고 온 버스를 타고자 호텔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국의 연세대 서원대 연변대 교수들의 학술모임이라고 하였다. 그 무리 속에서 연변대 김춘선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해 답사 길에 만났던 역사학자로 박창욱 교수의 대를 잇는 항일역사의 권위자다. 사람의 인연은 이어지게 마련인가 보다. “죄 짓고는 못 산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들은 우리가 타고 온 차와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간다고 하였다.

a 집행위원회 김형수 사무총장

집행위원회 김형수 사무총장 ⓒ 박도

218호실로 방 배정을 받아서 거기로 가자 방안이 깨끔하였다. 여장을 풀고는 산책길에 나섰다. 안내원들이 호텔 어귀에서 더는 나가지 말아달라고 하기에 언저리만 맴돌면서 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대회 시작부터 큰소리나 짜증나는 소리 없이 어려운 만남을 성사시키고 진행해 가는 김형수 작가회의 사무총장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았다.

고사리 취나물 등 소박한 산나물 반찬과 나물국으로 저녁을 산뜻하게 먹은 뒤 다시 뜰로 나왔다. 해가 지자 늪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환상적인 백두산의 밤이다. 회원들과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다가 내일은 2시에 일어난다고 하여 객실로 돌아가서 몸을 닦고 일찍 잠을 청했다. 고산지대라 썰렁해서 창문을 모두 닫고 불을 껐다.

a 해질 무렵 늪에서 솟아오르는 물안개

해질 무렵 늪에서 솟아오르는 물안개 ⓒ 박도


a 삼지연의 밤, 왼쪽부터 윤형두 임헌영 김병훈(북) 신세훈 선생과 필자

삼지연의 밤, 왼쪽부터 윤형두 임헌영 김병훈(북) 신세훈 선생과 필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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