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상의 안식처, '유림'의 숲으로

조광조의 혼을 부른 최인호 장편소설 <유림 1 : 왕도(王道) 하늘에 이르는 길>

등록 2005.08.28 13:29수정 2005.08.2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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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아아, 나는 작가로서 이 혼약한 시대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처럼 나약한 펜을 들어 글을 써 질문을 던지려 함이니. 공자여, 과연 그대가 2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을 다시 살아간다 하더라도 수년 안에 우리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조광조여, 과연 그대가 5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곁에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경세지략을 펼칠 수 있겠는가." -'책머리에' 중에서

최인호 장편소설 <유림> 1부 1권 표지
최인호 장편소설 <유림> 1부 1권 표지열림원
날이 갈수록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이 커져 가는 요즘에 최인호의 말이 가슴을 적신다. 동양사상의 대가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조선시대 최고의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조광조가 살아온다 해도 희망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지은이의 가슴앓이는 애달프기만 하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것을 가슴 속 멍울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그는 소설가이기에, 소설로서 시대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하지 않고 말을 건네 오고 있다. 그는 무슨 말을 던지는가? 동양사상이다. 그리고 유림에 관한 말이다. 그런데 유림이라는 말이 다소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교과서를 지배하는 이때에 왜 유림인가?

지은이의 말을 빌리면 '효'과 '충', '예'와 '경'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말하고자 한다. 지금 부족한 것을 그곳에서 채워보자고. 그래서 길 안내를 자처한다. 자신의 것만 옳다 말하며 다른 의견을 철저하게 묵살했던, 이 땅의 백성들을 고된 운명으로 내몰며 지배세력의 논거가 되었던 소수들만의 왜곡된 그것이 아니라 하늘을 뜻을 전하고자 공자가 말했던 것들로 가득한 '유림의 숲'을 향한 안내자를 자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안내로 조광조를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가 조광조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 지금, 필연적으로 질문이 떠오른다.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아니다. 누구나 조광조를 안다. 그렇기에 질문은 이것이다. '왜 조광조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불리지만, 동시에 성급한 개혁 추구로 뜻을 놓쳤다는 조광조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의도는 무엇인가?

<유림>은 조광조를 두고 또 한 명의 공자라고 말한다. 공자의 뜻으로 정치를 하려했음을 물론이고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 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 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한 명의 공자, 아니 공자의 현신라고도 말할 수 있는 조광조는 그 시대에 무엇을 했던가?

조광조는 '개혁'을 했다. 이제는 상투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동시에 자신이 권력을 갖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핑계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개혁, 그 자체로서의 개혁이었다. 권력을 위한 것도 아니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닌, 백성을 생각하고 하늘을 향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그 단어 그대로의 개혁을 말이다.


고려에서부터 내려온 것들, 나아가 이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던 것들을 유교적으로 바꾸기 위해 개혁을 했다. 또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점진적 확대로 백성들의 근본적인 것들을 개혁하려 했다.

뿐인가.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과정에서 내려진 공신목록에 얼렁뚱땅 이름을 올린 가짜 공신들을 개혁하려 했다. 더불어 사리사욕에 정신이 팔린 대신들로 가득한 조정을 개혁하려 했다. 그렇다. 그는 개혁을 했다. 자신의 위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뜻에 따라서 유교적으로.


유림이라는 단어에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테다. 과거와의 단절로, 혹은 과거의 왜곡된 모습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조광조라는 정치인을 악평하는 이도 있을 테다. 특히 그의 급격한 개혁추진으로 결과적으로 신진세력이 무너지고 훈구세력이 조정을 뒤흔들게 만들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그럴 테다. 하지만 그것이 조광조에 대한 진정한 평가인가?

지은이를 따라 '유림의 숲'에 들어가고 그 첫 번째로 조광조를 만나고 나면 유림이나 조광조를 낮게 평가하는 이도 본질을 두고 욕하지는 못하리라. 바로 조광조의 개혁 정신, 그것 말이다. 오늘과 과거를 돌아봤을 때 조광조처럼 개혁 그대로의 개혁을 추진한 이가 누가 있던가? 그 많은 개혁론자들이 백성을 위한답시고 개혁 노래를 떠들었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국문하려는 수령에게 정식으로 제출하는 공장으로, '옥중에서 진술한 말'로 이름지어진 이 내용을 통해 자신의 죄는 오직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들'과 '권력만을 잡으려는 집단의 야욕'에 맞서서 국맥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 단연코 다른 뜻은 없었다는 조광조의 육성이 문득 떠올라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본문 중에서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을 두고 그를 판단하는 것 또한 어리둥절한 일이다. 사실 그의 개혁이 실패했기에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은 더욱 많다. 그 실패는 지은이의 말마따나 오히려 더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권력만을 잡으려는 집단의 야욕'과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산된 것을 보여주었으니, 또한 그것이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유림>에서 지은이는 안내자이면서도 박수무당으로 분했다. 그는 조광조의 혼을 불렀다. 오늘을 꾸짖기 위함이다. 혼란한 시대에 <유림>은 참으로 소중한 등불이다. 가치가 무너진 어지러운 시대에 '유림의 숲'은 지친 이들을 위한 안식처다. 이 안식처에서 불을 밝혀보자. 곧은 이치와 도리가 보이리라.

유림 1부 - 전3권 세트 (1,2,3 권)

최인호 지음,
열림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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