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유림 3권장옥순
2006년 설날, 나는 책동네의 독자들에게 지난해 지키지 못한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유림’ 제3권 두 번째 읽기를 끝냈다.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유가사상에 뿌리를 둔 최인호의 ‘유림’ 제 3권은 한 번 읽고 서평을 쓰기에는 작가에게 미안했고 나 자신의 사상 또한 가난함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이미 1권과 2권의 서평을 올린 바 있으나 그것마저도 일독으로 올린 서평이라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작가 최인호가 10년을 투자하여 써낸 3권의 책을 짧은 순간에 수박겉핥기로 구경하고 서평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책을 읽은 그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소박한 심정의 발로임을 전제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 최인호가 보여주는 작품세계에 감복하고 그의 발길과 손끝을 따라 떠난 유림의 숲에서 동양 사상의 진수를 맛보는 행복한 책읽기로 신년을 시작하는 재미를 나누고자 한다.
2500년 전 중국에서 발아된 유가사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상의 주인인 공자조차 현실정치에는 적용해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꿈을 조선의 조광조는 왕도정치를 꿈꾸며 현실정치에 접목시켜 이상국가의 실현을 눈앞에서 놓친 유가사상. 유림 제1권에서 작가 최인호는 조광조를 통하여 유가사상으로 하늘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다. 2권에서는 2500년 전 공자의 유가사상과 붓다, 예수, 노장 사상까지 접목시켜 대비해 보이는 작가의 폭넓은 지평이 나의 영안을 뜨게 해 주었음에 감사한다.
어쩌면 요즘처럼 바쁜 디지털 시대에는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충고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배움의 자세를 견지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빠름의 철학이 서양의 물질 우선주의 사상이라 한다면, 그것을 견제하는 단추는 바로 느림으로 돌아가는 동양사상이 맞물릴 때 평형을 이루리라는 확신을 나름대로 깨닫게 되었다.
유림 제 3권의 화두는 ‘군자유종(君子有終)’이다. 디지털시대에 ‘군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다소 의아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이성과 감성체계는 여전히 ‘군자’를 그리고 있음을 본다. 정치가에게도, 과학자에게까지도 높은 도덕성과 엄격한 정직성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모습은 바로 ‘군자’의 모습이 아닌가?
공자의 유가사상이 조선의 조광조에 의해 현실정치에 접목되었다고 한다면, 공자의 사상적 뿌리와 줄기 끝에 꽃을 피운 것은 다시 조선의 퇴계 이황에 의해 열매를 맺고 완성을 이루었으니, 이 나라 조선은 유가사상이 이론과 현실이 함께 만난 ‘추로지향(鄒魯之鄕: 맹자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 성현을 존경하며 도덕을 가지고 학문을 숭상하며 예의를 지키는 고장을 추로지향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고학군자와 홍유석학이 많이 배출되는 고장을 일컬음)인 셈이다.
3권에서 만난 퇴계 이황의 모습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에서부터 출발한다. 조광조보다 불과 18년 늦게 태어난 이퇴계는 같이 공자의 유교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와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조광조가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실천적 제자라면 이퇴계는 공자의 말년 6년 동안에 집중된 학문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동양 최고의 학문적 제자이다.
퇴계는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극진하게 보살핀다. 그녀는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집안이 붕괴된 권질의 여식이었으나 존경하는 장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화를 당하여 정신이 혼미한 두 번째 부인이 죽는 날까지 보살피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학자로만 알고 있던 퇴계의 모습 위에 지극한 지아비의 모습으로 더욱 아름다운 퇴계. 퇴계는 권씨 부인을 하늘이 자기에게 주는 극기의 시험. 또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성덕의 체인으로 간주하고 이를 극복한 것이다. 퇴계는 부인과의 불화를 이기지 못해 고뇌하는 제자 이함형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의 고비를 준엄하게 질책한다.
“옛날 후한 때의 사람 질운이, ‘아내와 부부의 도리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내가 이 말을 빌어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하게.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퇴계의 편지를 받은 이함형이 크게 깨닫고 그의 아내를 손님처럼 극진히 공대하니,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가 죽자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었다고 한다. ‘양처를 만나면 행복해질 테고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라’며 결혼을 지상명령으로 보았던 소크라테스보다 한 단계 더 위의 부부윤리를 실천한 퇴계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두 아내와 사별함으로써 불우한 결혼생활을 보냈던 퇴계. 이함형에게 스스로 고백하였듯이 한결같이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으니 이를 참고 견디어 처가향념을 완성한 이퇴계.
권씨 부인을 사별한 후 2년 뒤에 만난 여인이 명기 두향이다. 두향과는 아홉 달 간의 만남으로 그친 사이이지만 두향은 퇴계와 헤어진 22년 동안 수절하고 퇴계가 죽자 스스로 목숨을 버릴 만큼 오로지 퇴계만을 사모한 여인이었다. 위대한 사상가의 뒤에 서서 온 생애를 지극한 비원으로 살다간 한 여인의 향기가 난해한 사상의 물줄기 위에 새벽아침 물안개처럼 독자를 젖어들게 하는 대목이다.
퇴계는 평생 동안 79번이나 벼슬자리에서 스스로 사퇴하였다. 퇴계는 이미 성현 공자의 생애를 통하여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위대한 철인이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열중하고 물러섬의 아름다움을 간과하는 요즈음의 정치가와 명예와 지위를 겸비한 ‘가진 자’에게 좋은 귀감이 아닐까 한다. 물러섬으로써 ‘군자유종’에 이른 역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이룬 유림의 숲에는 조선을 이끌어 간 유학의 거목들이 즐비하다.
유림 3권은 유학의 심오한 사상적 흐름을 논한다기보다는 공자가 씨를 뿌린 거대한 유림의 숲을 이룬 이 땅의 퇴계 이황의 족적을 따라가며 그의 인간적인 행보와 고뇌를 들여다보고 한 시대를 살다간 유림의 나무를 현대에 다시 조명하여 정신적 스승을 조명하고자 애쓴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 앞에 다시 태어난 퇴계를 만날 수 있다. 다소 어렵고 무거우며 딱딱하면서도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은 한 유학자의 잔잔한 일상과 사랑, 지식의 고뇌를 접할 수 있어서 곁에 두고 자주 펼치고 싶은 책 친구 100권의 선두 그룹에 초대해 놓은 책이 되었다.
지난 해 나는 과학계의 회오리 앞에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경험을 했다. 어쩌면 균형감각을 상실했던, 정신이 허약했던 탓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이는 곧 퇴계의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 덕행의 향상과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곧 군자학)이 부족한 학문의 전당에서 지식인들이 다시금 거듭나야 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니, 바쁠수록 돌아가야 함을 배우게 한 책이었다.
이제 새해 첫날의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시작한 유림의 숲에서 첫 대면한 퇴계의 발걸음을 따라 제자를 기르고 다듬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자세를 교실에서 꽃피우고 실천하기를 다짐하니 아직도 남은 겨울방학이 길기만 하다. 새 학년도에 만날 아이들에게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를 이야기하며 책이 주는 깊고 심오한 만남으로 한 순간에 깨달음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위대한 책 속으로의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오르리라.
책동네의 애독자 여러분에게 지면의 일부만으로 유림의 숲을 조망하는 혜안을 가지지 못한 채 두 번 읽고 올리는 서평만으로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리라 깊이 염려하며 감히 책친구로 맞이하기를 주저 없이 권하니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수평적 지식 여행을 원하는 학생이나 부모님, 선생님들께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합니다.
덧붙이는 글 | 유림3권의 서평을 모두 올리겠다던 약속을 지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고전으로 책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에세이> <한교닷컴>에 싣습니다.
유림 1부 - 전3권 세트 (1,2,3 권)
최인호 지음,
열림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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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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