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KBS
남긴 것이 흥분과 아쉬움만은 아니다. 활 쏘는 장면, 칼집, 거북선 침몰, 원균 미화, 최초 해전, 선조의 악역화 등 많은 역사적 사실 논란을 남겼다. 이러한 논란은 <해신>이나 <대장금>과 달리 역사적 허구가 적은 <불멸의 이순신>이 안고 출발한 한계였다. 더구나 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대중들은 누구나 많이 알고 있다. 극적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사실만을 다룰 수 없고 여기에 극적인 허구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가 관건이자 과제였다.
1년여간의 방영 기간 동안 단순한 역사적 소품의 논란을 제외하고 이러한 논란들은 이순신의 영웅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의 심리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거북선 침몰이 대표적이다.
선조의 악역 극대화는 이순신의 영웅성과 극적 재미를 주기 위해 부풀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를 접하지도 못한다. 과거의 전시(殿試)에서 보았을까 말까다. 전시는 왕 앞에서 보는 시험이니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 기록을 보아도 선조가 이순신을 경쟁자로 의식했다는 기록은 없다. 선조가 의심이 많았다고는 하나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전쟁에서 신하들에게만 말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더구나 당쟁의 격화가 임란을 불렀으니 누구를 믿겠는가.
이순신과 선조의 대결, 이는 이순신의 비극성과 영웅성, 극적 감동을 위해 만들어낸 고전적인 장치다. 이를 <불멸의 이순신>은 극대화했다. 그러나 차라리 광해군과 이순신의 대결을 그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전장을 직접 돌아다녔던 광해군과 징병과 관련하여 실제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광해군 시기에는 이순신은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해 묘비조차 없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야 대접을 받는다.
<불멸의 이순신>, 우리의 일본 콤플렉스 드러내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 논란, 인간 이순신의 시대적 비극성을 통한 영웅성만 남긴 것은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은 종족(宗族) 우상(偶像)의 드라마였다. 칼 맑스는 인간을 유(類)적 존재라고 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은 종족 우상의 포로라고 했다. 유적 존재는 인류 보편성을 말한다. 종족 우상은 종족주의적 배타성을 말한다. 집단적 일체감이나 감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편견이나 환영, 집단적 콤플렉스에 유지되어 간다.
이순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민족의 우상이다. 어느새 절대의 아우라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에 <대장금>이나 <해신>과 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관심을 보이고 그들에게 대대적으로 수출할 수 있을까? 한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가치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세계 명장 이순신을 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에 내놓을 수 있을까? 아직은 한국인의 시각과 가치관만이 강하다. 이순신을 자랑스러워한다면 더 넓은 인류적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감정적 민족주의에 치우칠 때 오히려 종족 우상만을 강화할 수 있다. 역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23전 23승이라고만 말하려는 것은 강국 일본을 대패 시켰다는 우월의 사실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영웅성을 부각할수록 이순신은 거꾸로 우리 사회의 일본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고대사에만 부각하고 그것에 함몰되어 일본에 우월한 의식만을 드러내려는 것과 같아진다. 당시 동북 아시아의 종합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에 대한 균형된 접근도 필요하다.
<불멸의 이순신>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호소력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보편성 확보에는 느낌표(!)가 아니라 물음표(?)였다. 이럴 때 자칫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드라마로 전락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gonews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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