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숨어 "가을의 전설"을 품고있네

전설발원지 제주 월라봉 답사기

등록 2005.08.31 19:07수정 2005.09.0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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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한라산을 횡단하여 서귀포 동쪽 신효마을에 가면 산쪽으로 월라봉이 위엄을 드러내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마을의 애환과 모진 풍파를 함께 겪어온터라 수목이 우거진 사이로 드러난 벼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월라봉 가는 길은 한결 여유가 있습니다. 제주의 생명산업인 감귤과 관광을 접목시켜 제주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기 위해 지난 2000년부터 감귤랜드 조성 및 감귤박물관 건립사업이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a 일가족의 기구한 운명이 구전되는 제주 월라봉

일가족의 기구한 운명이 구전되는 제주 월라봉 ⓒ 김동식

월라봉 산기슭에는 어느덧 가을소식을 갖고 온 반가운 손님들이 눈에 띕니다. 산책로 옆으로 코스모스와 강아지풀이 가을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섶섬이 보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기만 했다면 월라봉 답사는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을 것입니다.

a 가을이 깊어지면 저멀리 섶섬과 문섬도 성큼 다가오려나

가을이 깊어지면 저멀리 섶섬과 문섬도 성큼 다가오려나 ⓒ 김동식


a 자연의 풀밭에서는 시간도 멈춰 설까

자연의 풀밭에서는 시간도 멈춰 설까 ⓒ 김동식

처음에는 자연의 밖에서, 다음에는 자연을 옆에 끼고, 마지막으로 오름 능선에 기댔을 때는 든든한 자연의 품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향해 자연의 메시지를 전하는 우편배달부와 만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신발을 벗어 맨발로 텃밭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2005년 그 긴 여름의 끝에서

8월 31일, 가을의 문턱을 넘지 못한 오후 햇살은 여름날의 흔적이 조금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미생물이 뒤엉킨 흙에서 생명의 기운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듭니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귀속의 신경세포를 모으니 가까운 곳에서 풀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립니다. 가끔씩 눈앞에 나타났다가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들꽃의 생명은 끝인지 시작인지 알 수 없지만, 2005년 그 긴 여름은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가을이 되면 제주의 크고 작은 오름들이 세상과 더욱 가까이서 교신을 시작합니다. 짙은 녹음(綠陰)의 장막이 걷히고 감추어 둔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월라봉에도 가을이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들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가을을 맞이하는 월라봉은 왠지 특별할 것만 같습니다. 오랜 세월 마을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삶의 비애와 좌절, 꿈과 이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가 가을보다 먼저 월라봉을 떠돌고 있으니까요.

한 인간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편의 대서사시로 엮은 영화 '가을의 전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 가족의 기구한 운명이 구전되는 또 하나의 '가을의 전설'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월라봉에 얽힌 슬픈 가족이야기

월라봉 동쪽 기슭에 서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덕이나 도라지를 캐어 먹거나 마을로 내려가서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 생계를 이어가다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기까지 하였습니다.

행복했던 서국 가족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식구도 늘고 부인은 다시 아이를 가져 남의 집 품도 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가 잘 아는 집에 가서 품앗이를 하도록 재촉하기도 했으나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서국의 체격이 장대하고 배가 커서 다른 사람보다 밥을 두세 배나 더 먹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실망한 서국은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a 일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자연으로 돌아간 월라봉 산자락의 애기업게돌

일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자연으로 돌아간 월라봉 산자락의 애기업게돌 ⓒ 김동식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애기업게('아기를 등에 업고 돌보는 아이'의 제주방언)에 피붙이를 맡기고 자신이 직접 품앗이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관가에 잔치가 있었는데요. 관가의 일이라 얼른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여러날을 머물게 되었답니다. 어린아기와 애기업게는 먹을 것도 떨어지고, 배도 고파서 코눈물을 흘리면서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그만 실신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죽은 아기와 애기업게가 바위로 변한 '애기업게돌'이 서 있습니다.

며칠 후 월라봉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애기구덕('어린 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요람'의 제주방언)에 아기가 없는 것을 보고 구덕을 등에 지고 아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로 변해 버린 자식을 보고 충격이 큰 나머지 목 놓아 울다가 어머니마저 돌로 변해버렸습니다. 구덕을 등에 진 채 서 있다고 해서 이 바위를 '구덕찬돌'이라고 부릅니다.

a 자식을 가슴에 묻고 꼿꼿이 장승이 된 구덕찬돌

자식을 가슴에 묻고 꼿꼿이 장승이 된 구덕찬돌 ⓒ 김동식

얼마 후 집을 나갔던 남편이 돌아왔으나 아내와 자식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 부근을 '땅동산'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지요.

'애기업게돌'과 '구덕찬돌'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 삼호석(三護石 : 마을사람들은 '믠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이 있는데요. 신효마을에서는 한 맺힌 서국 가족의 비극적 삶이 마을의 한을 대변하고, 자신의 비극으로 더 이상의 비극이 다시는 찾아들지 말도록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a 비극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마을을 지키는 삼호석(믠돌)

비극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마을을 지키는 삼호석(믠돌) ⓒ 김동식

희망의 전설을 품은 마을공동체

이후 다른 마을에 괴질 호열자가 번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에도 신효는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난 1960년대 이후 제주의 생명산업인 감귤의 주산지가 되어 마을이 번성했음은 물론입니다.

저가 근무하는 감귤박물관에 가끔씩 찾아오는 신효마을 사람들은 전설발원지인 월라봉을 문화관광상품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희망을 자주 전합니다. 마을의 역사와 함께 슬픈 전설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저물 무렵 월라봉 기슭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새들은 어둠의 빛을 찾아 귀가를 서두릅니다. 산책로에는 저녁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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