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 그리고 글로 같은 '고향'을 말하다

이청준, 김영남, 김선두가 쓰고 그린 책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등록 2005.09.01 08:34수정 2005.09.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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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의미길래 눈을 감는 순간까지 차마 잊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리긴 했지만 때묻지 않은 자아와 그 때묻지 않은 자아인 '깨복쟁이'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어 고향은 생각만 해도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지요.

책 표지
책 표지학고재
그래서인지 길을 가다가 고향 이름이 들어 있는 식당 간판만 쳐다봐도 반갑고,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나면 마치 피붙이라도 되는 양 곰살맞게 대하게 됩니다. 고향은 그리움 그 자체입니다. 내 고향이야기야 밤새워 해도 모자라지만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고향 얘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어제는 소설가 이청준과 시인 김영남, 한국화가 김선두가 늘어놓는 고향이야기를 실컷 읽었습니다.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는 이 세 사람의 예술가가 공동으로 쓴 고향이야기입니다. 이들의 고향은 전라남도 장흥입니다. 장흥은 전라남도의 끝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지요.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라는 책 이름은 회진포와 천관산 장천재, 소설가 한승원의 '해산토굴' 등을 둘러본 후 자리에 누운 이청준과 세 사람 외에 마부 역으로 참가한 평론가 이만재가 나눈 이야기에서 따왔습니다.

"나는 아까 그 장천재 위쪽 계곡물 건너 진달래꽃 언덕 한 자락을 베고 자려는데, 이 형은 무얼 베고 자려오?"(이청준)

"저는 그 한재 고개 할미꽃 군락 속에 서서 바라본 득량만의 옥색 봄바다 한 자락을 덮고 자지요."(이만재)


이야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어느 계기가 있어 이 세 사람이 고향 장흥을 함께 읽어보자고 의기투합하게 됩니다. 그동안에도 각자 시인으로, 소설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의 눈으로 고향을 보고 읽고 쓰고 그려왔지만, 어디 한 번 우리 세 사람의 눈으로 고향을 함께 읽어보자고 뜻을 뭉친 것이지요.


김선두 그림 < 모든 고향에는 무지개가 뜬다>
김선두 그림 < 모든 고향에는 무지개가 뜬다>김선두
우리의 삶에 숙명의 그림자와도 같은 '고향'이란 무엇인가. 이후 근 3년 동안 우리가 거듭해온 고향길 화두는 물론 '그 고향의 참모습이 무엇이며 우리가 그 깊은 속살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느냐'였다.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그 땅의 비의(秘意)와 마주할 수 있으며, 우리 삶과 예술이 진정 그 땅의 계시와 사랑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느냐' - 이청준의 서문 '고향 속살 함께 읽기'에서

그러나 아무리 익숙한 곳이라지만 고향의 숨겨진 속살과 의미를 짚어내는 일이 어디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고향은 같긴 하지만 고향길을 더듬어가는 방법과 태도도 다르고 고향을 떠나온 속내도 저마다 다르고 가슴에 품은 고향의 모습도 제각각입니다.


소설가의 고향 "사람의 향기와 삶의 향기를 느끼는 곳"

이청준에게 고향은 아픈 상처였습니다. 아버지와 손위 형제들을 일찍 여의고 가세마저 기울어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나온 이청준. 무언가 이루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고향을 떠났던 이청준은 20년만에야 고향길에 나서게 됩니다.

75년경, 나는 마침내 그 피곤기와 부끄러움을 안고 고향길에 나섰다. 그리고 비로소 고향의 참모습을 만났다. 고향은 밖에서 이루고 지쳐 얻은 자들의 금의환향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었다. 밖에서 잃고 지쳐 돌아온 자들을 위해 휴식과 위안을 더 많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는 고향을 다시 찾으려 했을 때 길닦이 노력이 필요했노라고 말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지요. 다시 찾은 고향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사람의 향기였고 삶의 향기였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일로 그 20여년 전 오랜만에 시골 고향 동네로 노모를 찾아갔을 때였다. 밭농사를 짓지 않는 그 오두막집 마루 끝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누군지 담벼락 너머로 말없이 콩밭무 다발 하나를 던져 넣어주고 지나갔다. 그래 급히 사립을 쫓아나가 보니, 옛 어릴 적 친구의 어머니 되신 어른이 바쁜 발걸음중에 잠시 뒤를 돌아다보시며 늘상 얼굴을 대해온 사람이듯 대범스레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갔다.

"오, 너였더냐? 밭농사도 없는 이 집에 오늘 귀한 손님이 왔다길래 저쪽 우리 콩밭 다녀오는 길에 품김치거리 한 다발 뽑아다 나눴느니라."

그 말과 사람에게선 우리 세상과 삶의 훈훈한 향기가 뭉클 끼쳐왔음이 물론이다.

- 이청준 글 '삶의 향기, 말씀의 향기' 중에서


시인의 고향 "둥근 어머니가 계시는 곳"

김영남 시인의 고향 마을은 산과 산 사이에 장대를 걸치면 걸쳐질 것 같은, 산으로 빙 둘러싸인 곳입니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산에 둘러싸인 마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그의 시에는 김장을 담그고 남은 배춧잎으로 시래깃국 끓여먹던 풍경이 나오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외상으로 남기는 목포 아저씨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어머니의 둥근 얼굴도 나오겠지요?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고향이야기겠습니까.

내복의 검정 고무줄을
잡아당겨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고무줄에는 고무줄 이상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이상의 무얼 끌어안은 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무엇을 묶어본 사람이면 또 알 겁니다
어머니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을.
그래야 사람도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일수록 그런 신축성을 오래오래 간직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고무줄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어머니란 리어카 바퀴처럼 둥근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둥근 등을 굴려 우리들을 큰 세상으로 실어낸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지상 모든 고무줄을 비교하여 본 사람은 알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고무줄이 나의 어머니란 것을

- 김영남 시 '검정 고무줄에는' 전부 (애지 2004년 가을호)


김선두 그림 <그리운 옛집>
김선두 그림 <그리운 옛집>김선두
그렇게 정다운 곳이지만 지금 세상이 하도 변화무쌍한 시절이니 환멸이 없진 않겠지요.

'고향 옛길이 증발하고 없네'라는 시에서는 "고무신 신고 걸으면 개구리가 고구마처럼 차이고,/ 가을이면 색동 띠가 한없이 수를 놓았던 들녘, /저 쓰러졌던 수수밭 사연은 또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라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운 옛집'이라는 시에서는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화가의 고향 "잡초들이 정답게 어울려 꿈꾸듯 사는 곳"

김영남 시인의 시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주 나오는 반면 화가 김선두에게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 교사를 때려치고 화가의 길을 택한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단칸방에서 고생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고향집에 내려오신 아버지가 따로 떨어져 살고 있던 아들 김선두에게 24색 크레파스를 쥐어줍니다. 화가는 무슨 꿈만 같고 보물같았던 그 크레파스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처음 24색 크래파스를 처음 샀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긴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중3 때 느닷없이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조부모님과 함께 고향에서 살았던 김선두. 그에게 있어 고향은 모든 것을 포옹해주는 공간, 잡풀들까지 아무렇게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유스런 공간이었습니다.

영화 <취화선>에서 최민식의 대역으로 장승업의 그림을 그렸던 김선두의 수묵채색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화가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인 양 받아들이게 만들 만큼 정답습니다.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아저씨, 무언가 근심에 쌓여 한숨을 쉬고 있는 듯한 할머니,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그림 '성가신 봄'을 바라보면 마치 제 유년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아 즐거워집니다.

김영남 시인의 시 '푸른 밤의 여로'에 붙인 그림은 짙은 남색으로 가득 칠한 화폭 한가운데에 반달을 그려넣고 그 주변에 무수한 하얀 점들을 찍었습니다. 만일 제가 그림 속의 풍경 속에 서 있다면 아, 하고 탄성을 지를 것만 같은 환상적인 밤의 분위기입니다.

김선두 그림 <저무는 길>
김선두 그림 <저무는 길>김선두
작렬했던 하루해도 서서히 몰려가는 황혼 무렵은 평범한 풍경조차 살아 있게 한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스미고 번지는 이 시간은 순간순간 놓치기 아까운 비경들을 연출한다. 새벽과 함께 황혼 녘은 하루 중 풍경을 가장 역동적이게 하는 시간이며, 걷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던 하기식(下旗式)의 애국가처럼 엄숙한 시간이기도 하다. 황혼 녘은 이처럼 표정이 풍부하고 복잡하다.

- '저무는 길' 일부 (김선두 <나의 대표작>, 문학사상, 2004)


고향,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소설가와 시인의 맛깔스런 문장에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잘 어울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이 세 사람의 고향인 전남 장흥이 마치 내 고향이라도 되는 양 가슴마저 뭉클해집니다.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묘미는 글도 글이지만, 아무래도 김선두의 정겨운 수묵채색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그림은 마치 내 마음 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어쩌면 이리도 꼭 집어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합니다. 자, 우리 함께 예술가의 고향으로 가는 깊고 푸른 밤의 여로로 떠나볼까요?

김선두 그림 <푸른 밤의 여로>
김선두 그림 <푸른 밤의 여로>김선두
"…(전략)…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김영남 시 '푸른 밤의 여로―강진에서 마량까지' 일부

덧붙이는 글 |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지은이: 이청준.김영남. 김선두
출판사: 학고재
책값: 1만3000원

덧붙이는 글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지은이: 이청준.김영남. 김선두
출판사: 학고재
책값: 1만3000원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 시인, 소설가, 화가가 함께 걷는 '고향길 남도 산하'

이청준.김영남 지음, 김선두 그림,
학고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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