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118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9.01 11:13수정 2005.09.0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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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명화적(明火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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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햇살의 따가움은 여전했지만 후텁지근한 습기가 눅어 어느덧 여름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며칠을 절규하며 귀청을 찢어대던 매미의 울음도 종적을 감춘 지 오래, 공충도(충청도) 공주에도 여름 끝물의 기운이 완연했다. 금강을 비껴 봉황산을 등진 자리에 위치한 공충 감영이 술렁였다.


“어디 사는 뉘인고?”

“노성 사는 안여준이라 하오이다.”

족쇄에 칼까지 차 꿇려져 있는 40대 중반 가량의 사내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어찌하여 패륜지도를 하느냐!”

꽁지 수염을 기른 감사 박병익이 선화당 의자에 앉아 자못 위의를 갖추고 물었다. 무례하게 답하는 죄인의 태도에 언성을 높였으나 타성에 젖은 무미건조한 음색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직접 추문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마땅히 신봉할 도(道)요”

“배도하는 증거로 하늘을 보고 욕하여라. 그리하면 목숨은 건질 것인즉.”


“민의 죄목이 다른 것이 아니오라 하나는 경천(敬天)이요, 둘은 구령(救靈)이요, 셋은 애국이요, 넷은 효도가 죄목이오리까.”

“그리하면 이적지도(夷賊之道)를 배반할 수 있느냐?”

“천주는 만민의 왕이시오, 만민의 공부시거늘, 어찌 백성된 의무와 자식된 본분으로 능욕을 하리오.”

안여준이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을 내 뱉었다. 감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작년 병인박해를 기점으로 이제까지 한 두 번 보아온 광경이 아닌 터에 새삼 역정을 낼 필요도 없었다.

홍주, 예산, 보령, 남부와 청주, 진천, 연풍 등 북부를 포함한 공충도 전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라도의 전주, 광주, 경기도의 죽산, 포천의 신도들까지 감영이 있는 공주로 압송될 뿐 아니라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들까지 이곳에서 처형되니 그 수가 벌써 240명을 넘어섰다. 물론 그 숫자는 대원군의 명으로 고을 관아나 병영에서 즉참하고 계를 올린 인원을 뺀 것이었다.

“네 년도 마찬가지렷다?”

안여준 옆에 결박을 지워 꿇어앉힌 아낙에게 물었다. 국법으로 여자에게 칼을 씌우지 않도록 정하고는 있으나 이미 천주교인으로 몰린 죄인들에게는 정법의 적용여부가 무색한 상황이어서 결박만 지운 것이 외려 이상할 정도였다.

“어서 죽이시오. 이제 천주님의 곁으로 가게 되었으니 무엇이 두려우리까?”

이미 풀어진 머리채와 퀭한 눈, 더거리가 진 이마의 핏자국이 옥에 있는 동안의 고초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수그러들질 않았다.

“오냐, 그리 염려치는 말거라. 재촉하지 않아도 네 원대로 될 것이니. 다만 네 년이 바라는 대로 그리 편케 보내주지는 못할 듯하여 섭섭하구나.”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닌 두 사람에게 몹쓸 악형이 가해진 것이 분명하건만 감사는 아직도 여지를 두며 말했다.

어제 문초를 받던 종복 하나가 장형을 이기지 못하고 숨이 떨어졌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목숨 매를 맞다가 죽은 것은 차라리 복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영에서 멀리 떨어진 해미나 홍주에서는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쳐 죽이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치는 자리개질로 죽이기도 할 뿐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이는 방법과 생매장으로 교인들을 처형하는 등 유례 없는 남형이 자행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 맞다 죽는 일쯤 사고 축에도 끼질 못했다.

“여봐라! 이 년놈들과 옥에 있는 나머지 천주쟁이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형을 집행하라. 당장! 계는 그 뒤에 올릴 것인즉!”

“예이!”

동헌에 도열해 있던 사령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의 팔을 꿰었다.

“회개하시오! 천벌을 받을 것이오. 천주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 여러분은 불의 심판을 받을 것이오!”

안여준이 끌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옆의 아낙은 사령들에게 이끌리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계속 무슨 기도문인지를 읊조렸다.

“에잉.....”

감사 박병익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잡아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무군무부(無君無父)의 패륜을 서슴지 않는 양이의 사도(邪道)를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이 미욱한 무리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못 배우고 어리석은 무지렁이 농투성이들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어찌 성현의 도를 익히고 이 나라에서 진사의 직함이나마 얻은 자가 그런 혹세무민의 사도에 빠져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박병익의 마음이 착찹했다.

‘일벌백계하리라. 더욱 무섭게 죄어 감히 저 사악한 도를 가까이할 엄두를 못 내게 하리라.’

작년 병인년의 피바람이 봄을 넘어선 이후 잠잠해진다 싶었는데 누군가 진사 안여준의 식솔과 종복들을 발고해 왔다. 몰락하긴 하였으나 나름으론 양반의 혈족인지라 모른 채 넘어갈까도 했었다. 그러나 발고로 접수된 사안이고 워낙 여러 사람이 연루된 일이다 보니 강수를 두는 것이 나으리라 여겼다. 이 참에 흥선대원군의 눈에 들어 감사를 잉임하든가, 중앙의 요직으로 들어갈 꼼수로 활용하자는 생각도 작용했다.

“여봐라!”

결심을 굳힌 감사 박병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이”

“저잣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경계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가마를 대령하라. 내 친히 나가 참관할 것인즉.”

“예이, 분부를 받자옵겠나이다.”

형방이 목례을 올리고 빠른 걸음으로 선화당을 빠져나갔다. 푸르름이 절정에 달한 나무 한 그루가 뜰 한 구석에서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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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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