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진지한 삶의 이야기

아파트 주차장 잡초에 눈이 가다

등록 2005.09.04 12:52수정 2005.09.0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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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오후. 그 날은 다른 날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한 날이었습니다. 평소 주변에 어둠이 잔뜩 내려 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날따라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제 모습에 남편이 "오늘은 그만 집으로 들어가서 쉬라"며 등을 떠밀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뒷자석에서 가방이며 도시락 가방을 꺼내 주차장 뒤 보도블럭에 내려놓고 자동차 문을 잠그려는 순간, 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짓밟고 다녔을 보도블럭 틈 사이로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잘 자라 있는 여러 종류의 풀들이었습니다. 마치 저에게 그 어떤 이야기를 도란 도란 들려 주고 있는듯 했습니다.

한명라
한명라
저는 그때 꺼내 들었던 가방을 다시 자동차에 넣어두고 카메라에 그들의 여러 모습을 담기로 했습니다.

아주 작은 숨조차 쉬기 힘들 것 같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왔을 풀. 그들은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려는 저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잎사귀를 나풀거리며 서로에게 귓속말로 속살거리는 모습도 정말 보기 좋습니다.


한명라
한명라
척박하기 이를데 없는 가로등 아래의 작은 틈 바구니에도, 자전거 바퀴에 가로막혀 있는 틈 사이로, 하수구 뚜껑과 맞닿는 곳의 틈새를 비집고 자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심한 경비아저씨의 손길에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져 나간 친구들의 이야기도, 하루에도 몇번씩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야 하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숱하게 견뎌왔던 모진 세월의 흔적을 지금의 모습에 고스란히 끌어 안고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아파트 주차장 이곳 저곳을 배회하는 저를 보고, 경비아저씨는 "무얼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느냐"고 다가와 묻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하며 웃는 저를 보고, 하릴없이 잡초 따위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어쩌면 경비아저씨는 헛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명라
한명라
하지만 저는 그곳에서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주 작은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제가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듯 수선을 피우고 있지만, 그들은 오래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보다 더 높이 오르려고 있는 힘을 다 하여 앞으로 나아 갈 때에도 그들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반갑게 알아봐 주는 이 없어도, 그냥 그 자리에서 이제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그들을 향해 밀려오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느라 눈물나는 투쟁을 벌이고 견뎌 낼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알아 주는 사람 없어도 삶이 주는 고단함쯤은 끝끝내 떨쳐내고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한명라
한명라
위로만, 보다 더 위로만 바라보고 살아가느라 치열한 전쟁을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께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아오느라 많이 힘드셨죠? 가끔은 뒤도 돌아보며 지난날의 자신과도 만나보세요. 더 이상 시선을 낮출 수 없는 곳에 고개를 숙이면, 힘들어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진지한 삶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결에 하늘은 저만치 멀어졌는지, 또 언제부터 하늘은 저렇게 깊어졌는지, 순식간에 짙은 코발트빛으로 변해 버린 가을 하늘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와서 머물러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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