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담근 물김치, 걸작이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96] 무 물김치와 다양한 무 요리

등록 2005.09.05 03:52수정 2005.09.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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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무를 넉넉히 심은 진짜 이유


a 김치 국물이 밥을 빨갛게 물들였다. 고추씨를 씹어도 참깨처럼 고소하다.

김치 국물이 밥을 빨갛게 물들였다. 고추씨를 씹어도 참깨처럼 고소하다. ⓒ 김규환

2주 전인 지난 8월 중순 배추를 먼저 심고 며칠 있다가 무씨를 뿌렸다. 잦은 비에도 아주 배게 잘 났다. 여린 싹을 솎아서 열무김치를 몇 번 담가먹으려고 일부러 촘촘히 심었다. 아이들도 제 엄마와 흙을 덮느라 열심이었다.

삼일 째부터 무 떡잎이 양쪽으로 하나씩 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잎이 나서 쑥쑥 커간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산촌 밭엔 여러 작물과 어울려 자란다. 무는 정말 손이 가지 않는 작물이다. 퇴비를 대충 뿌리고 득득 긁어 굵은 씨를 흩어 뿌리고 막 덮어도 씨가 커서인지 땅 기운과 물만 먹고도 움을 잘도 틔운다.

풀만 한 번 뽑아주고 북만 한 번 해줄 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아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무로 동치미도 만들고 고춧가루와 굵은 소금만 넣고 버무려 섞박지를 담가 봄철까지 깔끔하게 먹으리라. 추억의 맛 무밥도 만들어볼까.

입맛 떨어질 때, 동태머리 다져 젓국물 만들어 깍두기 하나면 참말로 입맛 당기지. 겨우내 땅에 저장했다가 엇썰어 된장국 끓이면 시원하다. 갈치, 고등어, 명태 등 생선을 큼지막하게 싹둑 썰어 간장 붓고 약한 불로 달달 졸여 밖에 두고 살얼음 얼게 두면 이 또한 달고 보드랍고 시원하다.

잎, 뿌리로 수십 가지 요리가 나오는 대단한 무


a 무로 바개지라고도 하는 섞박지와 코다리 조림, 무채나물, 돌나물물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무로 바개지라고도 하는 섞박지와 코다리 조림, 무채나물, 돌나물물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 김규환

잎은 넉넉히 말려 된장국 거르지 않고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이뿐인가. 추어탕에 가장 어울리는 재료가 무 잎이라는 것까지 치면 한 가지 심어 스무 가지에 이르는 갖가지 솜씨를 발휘하게 하니 이 무란 존재가 없다면 우린 얼마나 서러울까.

무 뿌리를 약간 말려 장아찌로 박고 심심할 때마다 생채를 만드니 밥 비비기에 적당하다. 생채에 속잎 몇 장 잘게 썰면 더 풋풋하다. 무채를 도톰하게 썰어 국물멸치에 쌀뜨물이나 들깨국물 넣고 자작하게 끓이면 나물로도 그만이다.


역시 겨울엔 감자나 호박보다 무가 들어가야 한다. 입에 닿는 순간 깔끔한 맛이 느껴지고 감기도 막는데 한 몫 단단히 한다. 늦가을 건조한 바람에 무말랭이 쫄깃쫄깃 마르는 풍경은 싸늘한 기운에도 시골생활에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벌써 이토록 다양한 맛을 볼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넉넉해진다. 탐스런 무가 행여 얼까 밤잠 설치는 재미는 농사를 지어본 자만 누릴 행복이다. 여기에 초가을 내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 끌림이 있으니 다름 아닌 무 어린 싹으로 궁금한 입을 일깨우는 일이다.

밭에서 어린 무를 솎아오는 하루

a 깍두기와 무말랭이 말리는 풍경 그리고 무밥과 대보름엔 김가루에 얇게 무채를 썰어 짓국을 만든다.

깍두기와 무말랭이 말리는 풍경 그리고 무밥과 대보름엔 김가루에 얇게 무채를 썰어 짓국을 만든다. ⓒ 김규환

자, 먼저 밭으로 간다. 드문드문 난 배추와 달리 콩나물처럼 배게 심어진 무 싹을 끝까지 키울 실한 것만 빼고 하나둘 솎는다. 이 어린 걸로 무얼 할까마는 긴요하다.

요 어린놈들을 그냥 버릴 수도 있겠으나 일단 손톱을 칼날삼아 톡톡 따는 건 첫째 고추장이나 된장에 비벼먹기 위함이요, 다음은 집으로 가져와 빨간 생고추를 꼭지만 따고 씨와 함께 돌절구 확독이나 믹서에 갈아 물김치를 담기 위해서다.

더디지만 정성을 다해 뽑아나간다. 웅크리고 앉아 소곤소곤 대화를 하면 한 줌 두 줌 늘어 해름이면 한 움큼 넉넉하다. 날이 질세라 서둘러 빨간 고추 삼사십 개 따서 집으로 향한다. 아내는 식은 밥을 덜어놓고 벌써 된장국을 끓이고 있겠구나.

지금 집 근처에 와있으니 맛난 김치 담글 채비만 해달라고 부탁하리. 마음은 더 바빠 속도를 내보지만 어김없이 밀리는 병목에선 애가 탄다. 역시 누추하지만 내 집이 최고다. 구수한 호박된장국이 나를 끌어들이니 말이다.

먼 길을 달려와 푹 쉬고 싶지만 무싹이 시들시들해지면 원래 맛이 아닌지라 밥 먹는 시간을 뒤로 하고 물 한 사발을 축이고 물김치 담그기에 돌입했다. 사실 열거할 수 없는 갖가지 요리를 맛보는 재미보다도 쏠쏠한 게 오늘 하루 적은 양에 정성을 듬뿍 담은 싹 김치다.

고추물만 갈면 거의 끝난 셈

a 지난 겨울 살얼음이 언 싱건지 동치미, 지난 가을 무 생채, 가을 무 김치, 그리고 며칠 전 먹었던 무싹 비빔밥.

지난 겨울 살얼음이 언 싱건지 동치미, 지난 가을 무 생채, 가을 무 김치, 그리고 며칠 전 먹었던 무싹 비빔밥. ⓒ 김규환

가져온 홍고추를 다듬어 푹푹 분질러 넣고 들들 간다. 아이들에게 믹서를 맡겨둬도 즐겁다고 아우성이다. 생강 두 쪽과 양파 한 개 네 쪽으로 나누고 마늘 넉넉하게 넣는다. 마침 산촌에서 떠온 물을 조금 치니 빡빡한 느낌이 나지 않고 드르륵 잘 갈린다. 소금과 간장을 섞어도 좋다. 씨알이 소용돌이치고 고추껍질은 손톱만 하게 나뉘더니 더 잘게 부서진다. 아내가 퍼둔 식은 밥 서너 숟가락을 함께 넣으면 끝이다.

고루 섞인 양념에서 달콤하고 매운맛을 중심으로 뭔지 모를 다양한 맛이 어울린 듯 진미가 느껴진다. 마늘향, 양파향이 하나로 놀고 고추씨가 매옴하고 때깔은 선홍색이렷다. 생강이 코를 자극하고 밥이 오랜 시골집 구석지 맛을 가미했다. 여기서 무슨 맛이 날까보냐며 깔보았다간 큰 오산이다.

조심조심 아이 달래듯 말끔히 씻어둔 무 잎 물기가 빠지는 동안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 밖에 따로 할 일이 없다. 믹서 소리로 갈린 정도를 짐작하고 큼지막한 통을 준비하여 무를 깔았다. 이제 골고루 갈린 고추양념을 위에 쏟고 그냥 내버려둔다.

a 현재 잘 자라고 있는 무 밭, 그 옆에 심어진 고추를 따서 꼭지를 따고 씻는다. 양념과 식은밥, 간장과 소금을 조금 넣고 잘 갈아주면 쉽게 끝난다.

현재 잘 자라고 있는 무 밭, 그 옆에 심어진 고추를 따서 꼭지를 따고 씻는다. 양념과 식은밥, 간장과 소금을 조금 넣고 잘 갈아주면 쉽게 끝난다. ⓒ 김규환

돌절구에 고추를 가셨던 어머니 비결을 훔쳐보다

a 절이지 않은 어리고 풋풋한 무 잎을 바닥에 깔고 위에 잘 갈린 양념을 붓고 10여분 기다리면 풀이 죽는다. 굳이 풀죽을 쑤지 않아도 되는데 밥을 함께 갈았기 때문이다.

절이지 않은 어리고 풋풋한 무 잎을 바닥에 깔고 위에 잘 갈린 양념을 붓고 10여분 기다리면 풀이 죽는다. 굳이 풀죽을 쑤지 않아도 되는데 밥을 함께 갈았기 때문이다. ⓒ 김규환

..그래, 그 때 어머니가 떠오른다. 뒤안(뒤뜰)에 있는 잼피(초피) 잎을 한줌 따서 마저 갈고는 소쿠리에 있던 절이지 않은 무를 확독 절구에 쏟아 부었다. 이윽고 절구공이에 묻은 양념을 무로 싹싹 닦으셨다.

아래 있는 양념을 한손 위에 끼얹어 놓고 한참 동안 정지에 들어가 밥 차릴 준비를 하시고는 나타났으니 무슨 근심걱정이 생긴 걸까 염려한 기우는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행여 그 자리에 돈벌레나 쥐며느리가 들어갈까 지켜보는 건 내 차지였지만 하시던 일을 중단한 건 어머니의 깊은 뜻이 따로 있었다.

풋내 나는 걸 억지로 비벼봤자 음식 맛만 버릴 뿐이니 양념이 약간 배도록 간단한 조치를 하고 나중에 건들건들 슬렁슬렁 뒤집어주면 살짝 풀이 죽은 제들끼리도 적당하게 잘 스며 힘들이지 않고 고루 뒤섞인다는 이치를 알고 계셨으니 말이다.

참깨만 뿌리고는 설기설기 흐트러진 가느다란 무김치를 통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바가지에 반도 안 되는 물을 끼얹어 닥닥 긁고는 김치 위에 붓는다. 그걸로 끝이었다. 밥상에 그날은 국 하나에 보리밥만 가득 담아져 있다. 국그릇보다 더 큰 보시기에 두어 줌 한 움큼 담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김칫국물에 비빈 건지 말은 건지 몰라도 맛은 환상

a 갈린듯 만듯 고추 껍질 굵기가 보통이 아니지만 이래야 시골맛, 옛맛, 진짜 맛이 난다. 기다리다 서너번만 뒤적여도 물기가 쏙 빠져 흥건해지니 물을 많이 잡을 필요가 없다. 물김치는 이왕이면 좋은 물을 써야 한다. 간도 적당히 맞았다.

갈린듯 만듯 고추 껍질 굵기가 보통이 아니지만 이래야 시골맛, 옛맛, 진짜 맛이 난다. 기다리다 서너번만 뒤적여도 물기가 쏙 빠져 흥건해지니 물을 많이 잡을 필요가 없다. 물김치는 이왕이면 좋은 물을 써야 한다. 간도 적당히 맞았다. ⓒ 김규환

밥을 다 차리고 나서 들여다보니 정말 풀이 죽어있다. 뒤적뒤적 풋내가 나지 않고 조심히 몇 번 손을 움직이자 감쪽 같이 김치가 만들어졌다. 어느새 국물도 넉넉하게 불어나 있다. 배고픔에 상큼한 물김치까지 대령하였으니 젓가락이 필요 없다.

손으로 집어넣으니 아삭아삭 씹히는 느낌이 이건 김치가 아니라 예술품이다. 걸작 앞에 멍하니 멈춰서는 소년의 심성이 고와지는 이유에 비유할까. 나도 모르게 "됐어, 잘 됐구만"이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 상 다 차렸어요? 난 큰 양푼 하나 준비해줘요."

따끈한 밥에 김치와 국물을 넣고 비볐다. 밥이 빨갛게 물들여졌다. 치자를 섞은들 이렇게 고울까. 뒤적이면서 한 입 먹어보니 밥알을 함께 갈아 넣어서인지 찰떡같이 진득하다. 고춧가루가 아닌 고춧물이어서 칼칼한 맛은 사라지고 냉면보다 시원하고 깔끔하다. 어찌나 선명하게 맑던지 자연이 준 빛깔 자체다

살맛나는 세상-행복한 출발

a 초가을엔 호박을 크게 썰어 오래 끓인 호박국이 시원한 무김치와 어울린다. 이 것만 있어도 밥맛이 돈다. 밥에 끼얹어 먹으면 그만이다.

초가을엔 호박을 크게 썰어 오래 끓인 호박국이 시원한 무김치와 어울린다. 이 것만 있어도 밥맛이 돈다. 밥에 끼얹어 먹으면 그만이다. ⓒ 김규환

비빈 건지 말은 건지 모를 사르르 녹는 밥을 먹으며 국물을 떠먹으니 오랜만에 살 것 같다. 깨알이 씹히니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덜 갈린 고추가 이 사이에 끼었는데 빼먹는 맛도 오묘하고 고추씨를 내 입으로 직접 바수니 색다른 느낌이요, 비타민 영양제를 먹는 기분이다.

포만감에 달고 진한 된장국 떠먹는 것도 잊을 뻔 했다. 이래서 하늘이 높은 철엔 소와 말, 사람마저도 살이 찌는가 보다. 어떤 고깃국 먹는 것보다 듬직한 저녁밥을 먹으니 부러울 게 없다. 두어 번 더 솎아 숙지나물도 만들고 추어탕거리도 준비해야겠다.

신은 공평하다. 솜씨라곤 늘지 않은 아내와 해먹는데 도가 튼 내가 만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양새가 그렇다. 둘 다 잘 한다면 아마 우리 집은 긴장감이 똑 떨어질 게 분명하다. 요즘 세상에 남녀구분이 무슨 소용인가. 잘하는 것 나눠서 하면 되잖은가.

a 화학조미료 하나 치지 않아 느끼한 맛도 없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김치국을 떠먹으면 속까지 후련하다.

화학조미료 하나 치지 않아 느끼한 맛도 없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김치국을 떠먹으면 속까지 후련하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지난주 토요일 <산채원> 카페 회원 몇분과 이 김치를 나눠 먹었답니다. 다음 주제는 서리입니다. 콩서리를 재현하기 위해 이번 주말에 풋콩을 삶고 불에 구워 먹을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주 토요일 <산채원> 카페 회원 몇분과 이 김치를 나눠 먹었답니다. 다음 주제는 서리입니다. 콩서리를 재현하기 위해 이번 주말에 풋콩을 삶고 불에 구워 먹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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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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