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34

가야 하는 길, 와야 하는 곳

등록 2005.09.05 17:02수정 2005.09.0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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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몸이 좀 나은 겐가?"

사흘 동안 밥 한술 제대로 못 떠먹고 앓기만 하던 장판수는 퀭한 눈에 말라빠진 몸으로 겨우 병을 이겨낸 후 따뜻하게 내려 쪼이는 늦은 아침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나마 노인이 미음을 쑤어 장판수의 입에 떠 먹여 주며 극진히 간호를 한 덕분에 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셈이었다.


"고맙습네다 노인장."
"또...... 또 그 소리! 어차피 우리 할망구 간병하는 데 이골이 난 몸인데 자네 간병은 간병도 아닐세."

장판수의 앞에는 산발머리를 한 할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오래간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올 모양이구먼......"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장판수는 노인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 어이구......"


허공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갑자기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장판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고 노인은 급히 할머니를 안으며 방으로 데려갔다.

"자, 자...... 아무래도 괜찮은데 왜 이러오?"
"난 죽어야 해요! 그래야 영감도 남은 생 편히 살 것이 아니오!"
"어허 또 그 소리......"


할머니를 위로하는 노인의 말에도 울음이 지긋이 배어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진 장판수는 몸 상태도 알아볼 겸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산세가 참 험하기도 하다! 이런 곳에 은둔해 살면 누가 알아채기나 할까?'

장판수는 풍산으로 가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당장 이러한 몸으로는 길을 떠날 수도 없었고 험악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을 터였다.

'그래! 풍산으로 가면 뭘 하나? 그렇다고 의주로 가면 뭘 하나?'

실로 장판수에게는 아무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날부터 서서히 몸을 회복하기 시작한 장판수는 이틀 후에는 노인의 밭일을 도와주러 갈 정도가 되었다.

"아니 장씨! 갈 길도 급한 몸 같은데 여기서 일을 도와주면 어쩌나! 내 품삯이라도 바라고 병구완 한 것은 아니니 이러지 말게!"

"아닙네다. 내래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몸입네다."

이 빠진 쟁기로 밭을 가는 장판수는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갈 곳이 없다 해도 화전민들 외에는 이런 궁벽한 곳까지 흘러들어오는 이는 없네. 자초지종을 말해 보게나."

노인의 차분한 말에 장판수는 자신이 해온 일을 괜히 숨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병란을 겪은 일을 중심으로 그간의 일을 주저리 주저리 읊어 나갔다. 장판수의 말을 다 들은 노인은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으로 응답한 후 한참동안 하늘만 바라보았다.

"바깥세상에 그런 난리가 또 났는지도 몰랐네 그려......"

노인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고 장판수는 다시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들었다. 그때 마치 장판수의 손길을 막듯이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40년 전에 왜놈들 때문에 일어났던 임진년의 난리가 떠오르는구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우리 할망구는 참 눈부시게 고왔었지......"

어느 사이엔가 노인의 눈가는 젖어 있었고 장판수는 쟁기를 갈던 손길을 멈춘 채 노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지금은 산중의 촌부지만 한때는 방귀 깨나 끼는 집안의 종손이었네....... 허허허 쓸데없는 내 집안 자랑이 아니라 부질없는 한 때에 그랬다는 것이네. 그때 나는 한 낭자를 알게 되었지."

노인이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말을 멈춘 사이에 바람소리가 산자락에서 아스라니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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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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