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한편으로 가슴 적셔보면 어떨까

윤중호 시집 <고향길>

등록 2005.09.06 23:14수정 2005.09.0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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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에서 - 주말농장

일산시민모임에서 땅을 빌려 만들었다는 주말 텃밭
<고향길> 표지
<고향길> 표지문학과 지성사


쇠비름만 자라는 다섯 평짜리 박토지만
이름은 어엿한 주말 농장
글쎄 그런 걸 해도 괜찮을까?
무공해채소가 어떠니, 흙을 밟는 마음이 어떠니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
상추, 쑥갓, 고추, 가지, 열무, 하지 감자 등속을
심어서
위층아래층 두루두루 나눠 먹는 재미는 있을 거야
뻔뻔하게 끄덕이면서
알 만한 얼굴도 부러 외면하면서
그렇게 지겹던 호미질도 황송하게 하면서
방울토마토의 진딧물까지 반가운
이게 무슨 짓일까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서도 신도시 아파트에 살
면서
불쌍해라, 환호성치며 여치 소금쟁이 고추잠자리를
좆는 아이들을 보면서
빠꼼살이 같은 주말 농장의 김을 맨다.
그나마 정갈하게 제 태를 내는 밭은, 보물 같은
노인네들의 거친 손이 쉼없이 단도리하는 곳, 그
래도
터덜터덜 주말 농장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렌다.


하지 감자

쪽눈 하나로
저렇게 주렁주렁 뽀얀 세상을 키우다니…

치과에서

내가 내 마음 밭을 여벌로 여겼더니
띠풀, 쇠비름, 바랭이풀 그득하고

내가 내 몸을 업수이 여겼더니
딸딸딸딸, 아주 작정을 하고
치과의사가 내 몸을 갉아내네


아이구 셔.


시에 문외한인 내가 읽었을 때, 마음에 와 닿았던 시이다. 학창시절에 책의 흰 여백이 좁다할 정도로 밑줄 긋고 해석해주고, 시각이미지가 어떻고, 청각이미지가 어떻고, 공감각이 어떻고, 등등…. 시의 주제나 소재는 생활하고는 동떨어진 것들이 태반이었고 그러다 보니 시는 당연히 어려운 것 인줄로만 알았다. 생활이야기를 쓴 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즘엔 그래도 덜 한 것 같지만 여전히 시는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었다.


그런데 윤 시인의 시를 읽는 순간 그런 고정관념이 확 깨졌다. 윤중호 시인은 2004년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췌장암이란 진단을 받고 달포정도 투병생활을 하다가 아홉고개가 버거웠는지 채 쉰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윤 시인의 시는 추상적이지 않다. 그의 시엔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등장한다. 그의 주변엔 다양한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그는 늘 잘나가는 사람보단 밑바닥사람들, 즉 아이처럼 소박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졌다.

그는 질곡 많고 사연 많은 삶을 살았음에도 그의 시에선 구질구질하고 어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생활의 고단함에 대해선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애환이 녹아서, 도드라지지 않는, 어울려 사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진한 애정과 따스함이 배어나온다. 늘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럴 수 있는 것은 윤시인만이 가진 철학-사람을 아끼는 게 제일이라는-과 해학과 넉넉함을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승화시킨 탓일 것이다.

그는 충청북도 영동 심천에서 태어나 서울과 일산 등지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늘 늙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소원했다. 결국은 이생에선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시집 <고향길>은 윤 시인의 유고작이다. 지난해 그가 그렇게도 애틋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칠순기념에 내려갔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 윤시인의 시는 읽는 사람을 편안하고, 훈훈하게 해준다. 시를 몰라서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 시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가슴을 따뜻이 적셔줄 수도 있구나!

하늘이 높아지고 감성도 업(up)되는 이 가을밤에 시집 <고향길>을 옆에 두고 곶감을 꺼내먹듯 한 작품씩 읊조리면서 내 감성지수도 높여봐야겠다.

고향 길

윤중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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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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