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 그러나 폭포와 같은 소리

[인터뷰] 장석남 시인

등록 2005.09.07 03:47수정 2005.09.0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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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책 표지.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독특한 서정적 울림으로 등단 이후 꾸준히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받아온 시인 장석남(40).

지난달 다섯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낸 그를 만나 이번 시집과 그의 시 세계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용문산 자락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전화로 알려준 대로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내려 비포장 길을 걸어 올라간다. 비가 온 탓인지 원래 있던 것인지 모를 작은 개울을 두 개 건너니 멀리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함께 마중 나온 개 이름이 뭐냐고 묻자 '그냥 깜상이죠' 이러며 웃는다. 산길을 좀 더 오르자 딱 암자터로 보이는 곳에 얼마 전 공사를 끝낸 그의 작업실이 보였다. 이번 시집에서 '산거(山居)'라는 부제를 붙인 시를 쓴 곳이다.

낮은 목소리, 그러나 폭포와 같은 소리

- 그동안의 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둥글고 부드러웠던 것이 날카롭고 남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기존의 시들이 사물에 시인 자신의 정서를 투영했다면 이번 시집은 시인의 냉철한 정신을 보여준다는 인상입니다.
"이번에 책을 내고 그런 말을 자주 들었어요. 문체적인 특징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은 쓰면서 나를 풀어낸 거고 이제야 자기에서 벗어난 거 같아요. 속이 후련하고 나를 떠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더 어려운 거 같아요."

a 첫 시집과 이번에 나온 책 표지의 시인 얼굴. 맑고 순한 청년의 얼굴이 이제 세상을 살피는 40대의 도인풍(?) 얼굴로 변했다.

첫 시집과 이번에 나온 책 표지의 시인 얼굴. 맑고 순한 청년의 얼굴이 이제 세상을 살피는 40대의 도인풍(?) 얼굴로 변했다. ⓒ 문학과지성사

- 그런 면에서 이번 시에서는 이라크나 노무현 등 정치적인 소재를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으신 건가요?
"시라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처음 시를 쓸 무렵에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던 시가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런 비어있는 곳을 채우는 일도 또한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늘 아웃사이더로 남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은둔은 가장 정치적인 행위죠."


a 은둔하기 위해 마련한 작업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은둔하기 위해 마련한 작업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심은식

그는 단지 자신은 비어있는 곳을 채울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각오는 견고했다. 첫 시집에서 '시는 내가 음악까지, 춤까지, 타오름까지 타고 가야 할 아름다운 뗏목이다'라고 말했던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은 골키퍼로 '타협할 대상도 없이 날아오는 공을, 부조리를, 어리석음의 파편을, 평화를 부수고 승리하려는 도발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이전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인임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돌보지 않는 것을 돌보는 의연함으로 '심판이 사라진 세계'를 지키려는 그의 길이 그렇다고 거칠고 선동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라일락 같은 소리로
모래 같은 소리로
풀잎으로 풀잎으로
(중략)
너의 목소린 너무 크고 크다
더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들려줘
저 폭포와 같은 소리로,
천둥으로,
그 소리로

- '낮은 목소리' 부분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치를 말로 설명하면 그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속력으로 질주하듯,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려고 해요. 다만 아직은 나아가는 맛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드물게 후회 없는 일

그의 시 가운데 거문고를 다룬 것을 언급하다가 그에게 거문고 연주를 청했다. 호젓한 산골의 밤에 아득하고 아득한 소리가 풀벌레 우는 소리 사이로 녹아들었다.

a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석남 시인. 얼마 전부터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내 우둔한 질문들에 답 대신 거문고를 연주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석남 시인. 얼마 전부터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내 우둔한 질문들에 답 대신 거문고를 연주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 심은식

음악을 듣고 있으니 순간 고민이 되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얼마만큼 기사로 풀어내야 할까? 많은 질문들이 있었고 답변들이 있었지만 시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시가 아닌 것으로 요구하는 것 자체가 내 생각에도 부당하다는,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사는 독자가 가장 궁금해 할 것들만을 담는 것으로 줄이기로 한다. 넘치게 많이 주는 일은 말 그대로 늘 후회가 더 큰 법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로 글을 마무리 한다.

직장의 창가 화분 하나에 고양이풀이 돋아나서 겨울을 난다. 겨울에도 발그스레하게 물만 주면 깔깔댄다. 저년이! 하면 또 깔깔댄다. 물 준 지 오래면 다 죽은 듯 풀어헤쳐져서 늘어지지만 물 주면 두어 시간이 가지 않아 다시 일어선다. 불굴의 애교다. 곁의 화분으로도 옮겨가는 것 본다. 받침 접시 넘치게 물 주어 걸레로 닦으며 많이 준 것 참 드물게 후회 없다.

- '고양이풀에 물 주다' 전문


장석남은?

시인 장석남은 1965년 경기도 덕적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방송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제1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에 두번째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1998년에 세번째 시집 <젖은 눈>을 상자하였다.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제44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1년 네번째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2005년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상자하였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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