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부인의 첫사랑, 그 실체는?

[서평] 기쿠치칸의 <진주부인>을 읽고

등록 2005.09.09 01:02수정 2005.09.0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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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어느 누구라도 그 한마디를 들을라치면 아련한 떨림에 아마도 한순간 짜릿해질 것이다. 또한 첫사랑이란 그 한마디는 어느 누구라도 하얀 순백의 백지상태를 만들만큼 무조건적인 순수함의 파장을 만들 것이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기에 오래도록 우리네 가슴 한켠에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꽁꽁 숨겨져 있다고들 말한다.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 그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하얀 구름들. 흰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계절은 가을이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뜬금없이 내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되새겨 보느라 몇날 며칠 헤어날 수가 없었다.


첫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라 무조건 맹신했던 지난 시간에 대해 생뚱맞게도 정말 첫사랑은 아름답기만 한 걸까를 요 며칠 새삼 갈등하였다. 나로 하여금 그런 갈등을 하게 만든 건 바로 루리코란 한 여인이다.

a '진주부인' 책표지

'진주부인' 책표지 ⓒ 이가서

일본 근대 초기의 최대 유행작가 중 한사람인 기쿠치칸의 대표적인 대중소설인 <진주부인>. 1920년 도쿄일일신문과 오사카 매일신문에 연재되어 일본 '가정소설'의 새 지평을 여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던 소설로서 2002년에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쓰여 진 이 작품이 21세기인 2002년에 홈드라마로 제작이 되고 DVD로 발매되고 책이 복간 되는 것에 대하여 이 책을 번역한 양경미씨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20년대에 쓰여 진 일견 신파조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이 근대소설은 20세기와 21세기라는 물리적인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특유의 정서를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흥미로운 전개로 인해 의외의 흡인력을 갖고 있다.

기발하고 감각적인 문체가 판치는 현대에도 오래전에 발표된 이 작품이 통속 소설의 걸작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더불어 현대인들은 어쩌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것들보다는 어쩌면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묵직하면서도 진지한 과거의 것에서 오히려 참신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는 걸 나는 실감했다. 유난히 분주한 시간 속에서 이 책을 펼쳐들면서 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미 습득하고서 책을 펼쳤어도 도무지 어떤 전개가 다음 장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쏟아지는 잠에 책갈피를 접으면서도 조급증에 나는 몸이 달았다.

뻔한 통속소설의 스토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별다른 스토리 전개가 뭐 있을까싶었던 애초의 내 고정관념은 시시각각 전개되는 상상외의 스토리 전개에 보기 좋게 한방 맞고 말았다.


이 책의 주제를 딱 꼬집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여자의 한'이라고 말하겠다. '여자의 한'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서리는 내렸다. 그것도 아주 된서리가 말이다. 그러나 그 서리를 맞은 사람은 당사자 하나가 아니었다. 다수의 남성들이었다. 신이치로가 탈 택시에 우연히 동승하게 된 아오키준. 그들은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신이치로는 아오키준의 유언을 들어야 했고 그의 유품인 피 묻은 시계를 건네받게 된다.

아오키준의 유품을 전달받을 사람은 바로 루리코. 신이치로가 아오키준의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녀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루리코. 가난한 남작인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슴을 온통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고 있던 첫사랑을 뒤로 한 채. 결국 벼락부자인 쇼다와 결혼을 하는 루리코.

루리코의 피맺힌 절규는 그의 첫사랑인 나오야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녀의 가슴에 한으로 남은 건 첫사랑 나오야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또한 당신의 사랑을 받았던 티 없이 깨끗했던 소녀는 잔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모든 여성스러움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모든 여성다움을 복수의 신께 바쳤습니다. 사랑도 애정도 조신함도 정숙함도 그 흑발도 하얀 피부도. 아아, 악마여! 좀 더 내 마음을 황폐화 시켜다오! 내 마음에서 마지막 남은 부드러움도 수치심도 모두 빼앗아 가다오!'

운명의 여신은 루리코를 가엽게 여겼던 것일까. 일단은 루리코의 손을 들어 주었다. 쇼다는 불행하게도 루리코를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루리코의 복수가 끝이 났나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루리코는 이미 화려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다. 넘쳐 나는 재력을 소유한 미모의 미망인. 그녀의 복수는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그녀를 유혹해보려는 뭇 남성들에게로 복수의 칼끝을 겨냥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아오키준이었다. 루리코의 사랑이 자신만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라 철석같이 믿고 믿었던 아오키준. 그는 어느 날, 루리코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끝없이 이곳저곳을 방황한다.

그러던 중 신이치로와 우연히 동승하게 되고 이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오키준의 교통사고는 자살을 앞당긴 것이 된 것. 신이치로는 루리코를 찾아가 아오키준의 사랑을 설명하려 한다. 더불어 더 이상 남성들을 농락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루리코는 냉소적이다. 신이치로를 향해 오히려 남성들의 양심을 비난하고 힐책한다.

'여성이 남성을 농락한다면 당신네 남성들은 이내 요부네 독부네 하며 온갖 못된 이름을 덮어씌우죠. 당신네 남성들은 눈빛까지 변해가며 질책을 하려들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남성들이 얼마나 여성들을 농락했는지를. 여성이 남성을 농락했다면 그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쉬운 남성들의 마음을 농락한 것에 불과한거 아닌가요. 남성이 여성을 농락할 때는 몸도 마음도 명예도 절개도 모조리 유린하지 않았던가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남성에게 농락당한 여성들의 살아 있는 끔찍한 시체가 몇 구나 뒹굴고 있는지 아십니까? 남성은 여성을 농락해도 좋고 여성은 남성을 농락하면 안 된다는 그릇된 남성위주의 도덕에 저는 이 한 몸을 걸고서라도 대항할겁니다.'


1920년. 아마도 이 시대는 순종을 여성의 미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황금만능주의와 남성위주의 세태에 맞서 싸우는 진보성향이 강한 루리코라는 구체적으로 정립된 여성상을 그려냈다. 그랬기에 세기를 뛰어 넘은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루리코. 그녀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청년에 의해 죽는다. 그 젊은 청년은 바로 아오키준의 동생이다. 죽음직전, 루리코는 꿈에도 그리던 첫사랑 나오야를 만난다. 죽어가는 루리코의 가슴에 남은 건 과연 무엇일까.

그릇된 남성위주의 도덕성에 전부를 걸었던 그녀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허무하게 내던져졌던 루리코 자신의 청춘도 예리한 칼끝에 베인 것 같은 아픔으로 그녀 가슴에 분명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뭔가 결론나지 않는 미지근한 아쉬움이 끝없는 여운으로 남겨졌다. 첫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첫사랑의 아름다움이 무서운 복수를 낳았고 그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그렇다면 루리코의 첫사랑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과연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어쩌면 저자는 첫사랑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통해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듯 맹목적이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싶다.

활화산처럼 뜨겁게 살다간 루리코의 짧은 삶. 다수에게 겨누었던 복수의 칼날을 결국 자신의 가슴에 꽂고야 만 참으로 불행했던 여인. 그녀를 만나고 난 지금 그녀의 첫사랑이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진주부인 - 상

기쿠치 간 지음, 양경미 옮김,
이가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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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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