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녀가 둘이냐 셋이냐!"

시어머니의 손녀사랑은 과연 얼마나 크고 깊을까요

등록 2005.09.13 10:00수정 2005.09.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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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는 아침 햇살 속으로 폴짝거리며 뜀박질을 해대는 딸아이의 얼굴이 햇살만큼이나 눈부십니다. 저만치 앞질러 달음박질치던 딸아이가 뒤처져 따르는 저를 향해 빨리 오라 고사리손을 별처럼 흔들어댑니다.


몇 발짝 차이라고 저를 기다리던 딸아이는 허리를 구부려 또 신발을 내려다봅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신발 끝을 톡톡 튕겨봅니다. 저는 일부러 늑장을 부립니다. 딸아이가 행복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복희야! 그렇게 좋아?"
"네. 정말 좋아요. 어린이집에서도 내내 신발 신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내 신고 있으면 금방 헌 신발 될 텐데."
"헌 신발 되면 할머니가 또 사주신댔어요."

"정말? 와! 복희는 좋겠네. 근데 할머니께서 돈이 없으실 텐데."
"그럼 엄마가 할머니 돈 많이 드리면 되잖아요."

"엄마도 돈이 없는데?"
"그럼 아빠보고 달라고 하세요."


"아빠도 돈이 없을 텐데."
"그럼 아빠는 할아버지 보고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할아버지도 돈이 없을 텐데."
"그럼 할아버지는 외할머니 보고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터져 나오는 웃음이 결국 아이와의 긴 입씨름에 종지부를 찍게 합니다. 배꼽을 잡고 웃어대는 제가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포도송이 같은 까만 눈동자를 유달리 반짝거리며 말가니 쳐다봅니다.

그러더니 밤나무에서 밤송이 떨구듯이 '툭'하며 한마디 던집니다.

"외할머니도 돈 없으면 외할아버지께 달라고 하면 되는데."

아예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을 웃고 있는데 어린이집 차가 저희 모녀 앞에 소리 없이 스르륵 멈춥니다. 딸아이가 냉큼 차에 오릅니다. 그리곤 차 안이 떠나가라 '다녀오겠습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아이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인 것 같습니다. 요 며칠 딸아이는 내내 이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할머니에게서 신발과 옷을 추석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토요일(10일) 오후. 시댁에 들렀습니다. 일주일만에 만나는 시어머니와 딸아이는 마치 몇 년만의 극적인 상봉이라도 하는 듯이 서로 얼싸안고 볼을 부비며 괜한 소외감으로 저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라 추석 장 볼 것이며 집안 어른들 선물 준비로 시어머니와 이런저런 의논을 하였습니다. 저녁거름. 막 일어서려는데 시어머니께서 뭔가를 제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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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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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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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에미야! 이거 복희 추석빔인데… 에미, 아무 소리 말거라."
"어머니. 복희 옷 많은데 뭐 하러 사셨어요?"

"복희라고 맨 날 싸구려만 입으란 법 있냐. 돈으로 주면 또 시장 가서 싸구려 사 입힐 테고. 이번엔 큰 맘 먹고 이 할미가 손녀 옷 한 벌 샀으니 그저 암 말 말고 입혀. 그러고 내 손녀가 둘이냐 셋이냐. 그저 저거 하난데."
"…."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녀가 둘이냐 셋이냐.' 이 말씀은 저의 입을 막기 위한 시어머니의 비장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만큼은 저는 시어머니 앞에선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매불망 기다리시는 손자. 손녀 하나 달랑 안겨 드리고 그 손녀가 일곱 살이 되도록 손자 소식은 도대체 감감무소식이니.

순간 시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어머니께서는 오랜 기다림에 이젠 지치셨을 거라 혼자만의 짐작을 하여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하나뿐인 손녀에게로 향하는 애틋함이 더하리란 것도, 더불어 손녀에게 한 철 입히고 말지라도 좋은 옷 입히고픈 마음이 더 절실하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해마다 명절이 되면 제게 돈이 든 봉투를 손에 쥐어 주면서 늘 말씀하십니다.

"늙은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에미 마음에 드는 걸로 복희 옷 한 벌 사 입혀라."
"어머니. 복희 옷 많아요. 넣어 두셨다가 어머니 용돈 쓰세요."

"그래 내가 지금 용돈 쓰는 거다. 할미가 명절에 손녀 옷 사주는 거. 그게 제일 쓰고 싶은 용돈 아니냐."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시어머니께서는 제일 쓰고 싶은 용돈이라는 말씀으로 기어이 저로 하여금 봉투를 받게 만드십니다. 그리곤 한마디 덧붙이십니다.

"아쉽다고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복희 옷 사 입혀야 한다."

시어머니께서는 봉투를 주실 때마다 번번이 제게 서운함을 금치 않으셨습니다. '좋은 거 한 벌 사 입히지 않고…'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주신 돈으로 오일장에 가서 지금까지 바지 두어 장과 티 두어 장을 사 입혔습니다.

요즘 아이들 옷은 옛날처럼 헤져서 버리는 게 아니라 작아져서 못 입는 경우가 거의 태반입니다. 클 때는 하루 밤 자고 나도 콩나물 자라듯이 자란다고 딸아이의 옷은 거의가 해를 넘기고 나면 작아져서 못 입곤 합니다. 그러니 비싼 옷 사 입히는 게 괜한 낭비 같아 오일장에서 늘 싼 옷을 사 입히게 됩니다.

시어머니께서는 그런 저를 늘 서운해 하셨고 급기야 올해는 당신이 직접 딸아이의 옷을 사셨던 겁니다. 옷뿐만이 아니라 신발까지 사 놓고 이제나 저제나 딸아이를 기다리고 계셨을 시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따끔따끔 아려 왔습니다.

하지만 아줌마의 속물근성은 어쩔 수 없는지 옷과 신발에 붙은 가격표에서 왜 그리 시선을 떼지 못하는지. 슬금슬금 가격표를 훔쳐보는데 기어이 제 입이 오두방정을 떨었습니다.

"어머니! 이 가격이면…."
"내 손녀가 둘이냐 셋이냐!"

시어머니는 비장의 무기로 제 말을 단칼에 베어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옷과 구두를 가슴에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딸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시어머니의 촉촉한 두 눈이 따갑도록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손녀 사랑.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마음에 무심히 올려다 본 가을하늘. 끝 간 데 없이 높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습니다.

문득. 시어머니의 딸아이에 대한 사랑이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고개가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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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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