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은 얘기를 듣고도 가만 있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적극적으로 실행한 것도 자신이었으므로 딱히 나설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결과의 화살은 대원군에게로 집중되고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완전히 백기를 들고 대원군의 휘하에 들어야 하는가 고민도 적지 않았으나 풍양 조씨 쪽에서도 반기의 기미를 비치므로 다시 재고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벌써부터 저희 가문에 쏟아지는 유림의 압력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양반의 복식까지 규정해 주며 통제를 하려드는 처지이다 보니 대원군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만약 서원철폐령을 막지 못한다면 그 욕을 고스란히 우리가 먹어야 할 상황입니다.”
김병기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라고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나. 대원군이 무뇌인도 아니고 아직까지 우리 안동 김문을 요직에 남겨두는 이유가 뭔가? 우릴 누를 힘이 없어서? 다 이럴 때 유림의 방패막이가 되라고 이러는 것 아니겠나.”
김병학은 눈을 감고 지그시 말했다.
“그럼 이대로 대원군 쪽에 서 있자 이 말입니까?”
김병기가 격앙되게 말했다.
“그건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모인 것 아닌가. 불안해. 무언가 한바탕 터질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때가 온다면 우리도 무언가 판단을 내려야 할 게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어쩌면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무슨… 복안이라도?”
“두 가지. 지금 임금을 갈든지 임금과 대원군을 갈라서게 하든지.”
“에헥?”
눈을 감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김병학의 말에 모두가 자지러지게 놀랐다. 김병기가 흥선대원군을 ‘이하응’이라 표현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경직되는 판인데 경천동지할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조심성 많은 조영하가 고개를 내밀고 또 밖을 훑었다.
“진정이시옵니까 형님?”
김병기가 영상대감이라는 호칭도 잊고 얼이 빠져 되물었다. 조성하나 조영하도 얼이 나간 표정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사람들 새삼 왜 이러시나? 그럼 이 자리에 모인 것이 그만한 뱃심도 없이 모인 것이었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워낙 형님께옵서….”
“농이 아니야. 설피 건드려서 된불을 맞을 일이 있나. 자신이 없으면 이 자리만이라도 감지덕지 해야할 노릇이고, 일을 벌일 거라면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일이겠지.”
“만약… 역성(易姓)을 하신다 치면 뉘를 옹립하려 하시는지….”
“역성까지는 아니고… 흥인군의 자제 이재긍이라면 어떨까 싶은데?”
김병기의 말에 김병학이 넌지시 떠 봤다.
“흥인군이라면 흥선대원군의 친형인데, 결국 그 밥에 그 나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꼭 그렇지만은 않지. 사도세자의 혈통을 따져 내려오자면 흥인군이 적장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아들 이재긍이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 옳지, 지금의 체제는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허방을 딛은 흥인군의 속이 좋지 않은 터에 작년 경복궁 화재 때 영건도감의 제조이자 호위대장이라는 이유로 내쳐진 후 대원군에 대한 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지”
“그러니 흥인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새 임금을 옹립하는 일에 우리가 나서고 그 뒤의 국정운영권을 우리가 가진다 이 말씀이로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대원군과 주상의 사이를 벌어지게 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새 주상을 옹립하는 일이 어렵다면 차라리 지금 주상이 친정을 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이지.”
“그래도 부자지간인데 아비를 내치고 친정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 점은 염려마시오소서.”
김병기의 질문을 물고 조성하가 나섰다. 선왕대부터 대비전 승후관을 지내고 승지로 잔뼈가 굵은 조성하인 만큼 궁궐 안에서의 사정엔 누구보다도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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