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외로우면 사람이 반갑다

나이 사십에 도전했던 백두대간 연속종주이야기

등록 2005.09.14 11:51수정 2005.09.1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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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마을 앞에는 맑고 깨끗한 내가 흐르고 있다. 앞에는 아기자기한 모양을 한 암석들로 이루어진 산이 있다.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을 앞을 통과하는 개천을 건너야 한다. 동관1교라 쓰인 다리를 건너자 마을 가운데 도로가 나 있다. 도로는 차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다리를 건너면 마을 입구에 몇 백 년은 나이를 먹었을 밤나무가 있다. 밤나무를 지나면 집이 담과 담을 붙여 계속 이어진다.

a 동관리 마을 앞 냇가

동관리 마을 앞 냇가 ⓒ 정성필

다리를 건너, 밤나무를 지나 첫 번째 집이 신노인의 집이다. 노인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노인은 혼자 살고 있다. 자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서울서 산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도 없이 노인 혼자 사는 모습인데도 마루며, 얼핏 들여다 본 방안이 깨끗하다. 마당을 깔끔하게 쓸어놓으신 것도 보통의 살림꾼이 아닌 듯하다. 노인은 심심풀이로 토끼를 키운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새끼를 낳았으니 한 번 보라 하신다. 들여다보니, 주먹보다 작은 새끼들과 어미가 귀를 쫑긋이 세우고 있다. 앙증맞은 모습이 꼭 깨물어주고 싶다.


신 노인을 만난 것은 화령에서였다. 길을 묻다가 알게 되어 속리산 가기 전 꼭 집에 들러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신 노인은 혼자였고, 그는 외로움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집안 구석구석을 깔끔하게 청소하면서 살고 있지만 외로움 앞에는 모든 사람이 다 반갑다. 동관리에서는 대부분이 노인이고 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이미 십년도 넘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신 노인의 연세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67세인데, 이 마을에서는 젊은 축에 들어 마을 총무를 보고 있다고 하신다.

a 동관리 다리

동관리 다리 ⓒ 정성필

노인은 마당에 화로를 꺼내고 화로 위에 석쇠를 올려놓는다. 언제 뜯었는지 상추와 깻잎을 내오신다. 돼지고기를 석쇠 위에 올려놓고 소주를 마신다. 화령장에서 자네 올 걸 생각하며 준비했다 말씀하신다.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아무 인연이 없는 사이인데도, 그는 나를 아들처럼 맞이 해주신다. 마을은 조용했고, 사람들이 다니는 인기척도 없다. 워낙 깊은 산중이기도 하지만 마을이라야 크지도 않고 또 뛰어다니거나 노는 아이들이라도 있어야 마을에 인기척이 있을 텐데, 전혀 없다.

고요한 상태에서 숯불에서 익어가는 돼지고기의 향이 연기에 섞여 점점이 퍼지고 있을 따름이다. 어른은 자식자랑을 하신다. 큰아들은 교사가 되었고 작은 아들은 대기업의 과장이라 하시고 딸은 모두 시집 잘 가서 걱정 없이 산다 하신다. 노인은 말끝마다 힘을 주어 자랑스레 말씀하셨지만 혼자 사는 노인의 외로움은 주름살마다 깊게 패여 있었다.

a 동관리 앞산

동관리 앞산 ⓒ 정성필

술이 오르고 돼지고기가 떨어질 때쯤 되자 노인은 날더러 해머를 들고 따라 나오라 한다. 노인의 손에는 고기를 담는 통이 들려 있다. 냇물은 깨끗하다. 속리산 자락에서 흐르는 물이라 생각하니 이미 마음은 속리산에 간 듯하다. 해머로 고기 잡아 보았냐 물으시니 나는 머쓱할 수밖에 없다. 서울서 태어나 서울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은 물고기를 잡아본 경험이 있을 리 없다. 어른은 나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신다.

해머를 번쩍 들어 돌을 때린다. 돌을 때리고 날더러 돌을 들고 있으라 한다. 근력이 청년 같으시다. 돌을 들고 있는 사이 노인은 손을 돌 밑에 넣어 기절한 물고기를 잡는다. 시범을 보였으니 나에게 해머를 넘겨주신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가고 조금 남은 낮의 기운이 아직 사물을 분간하게 한다. 물고기 통은 얼마 잡지 않았는데도 가득하다.


a 신노인 댁

신노인 댁 ⓒ 정성필

매운탕을 끓이고 매운탕에 다시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지만 취하지 않는다. 술이 약한 나는 쉽게 취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희한하게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노인의 깔끔한 살림솜씨나 잘 정돈된 농기구 나에게 보여주신 앨범마다 기록해 놓은 꼼꼼함까지 아버지가 연상된다. 아버지도 오래전 어머니와 사별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혼자 살았다. 십년을 넘게 혼자 살면서 살림도 청소도 정리도 모든 게 깔끔했다. 자식 자랑 하시는 거하며 말씀하시는 모습이 꼭 아버지 같다.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술도 적당히 마신 다음 노인은 나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오라 하신다. 마을 구경을 한다. 연세가 80이 넘은 할머니가 사는 집부터 마을 회관까지. 80넘은 할머니는 늦은 시각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무언가를 가마솥에 달이고 있다. 물었더니 자식들 오면 주려고 무얼 만든단다. 무어냐고 물으니 수줍게 웃으시면서 말할 수 없단다. 더 묻지 않는다. 마을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 노인들은 오직 자녀들이 오는 날을 위해 준비하시고 또 준비하신다. 마을 입구에 소파가 몇 있는데, 그걸 보았냐 물으신다. 보았다 하니 설명해주신다.


a 신노인 댁

신노인 댁 ⓒ 정성필

왜 그 소파가 마을 입구에 있는지. 어른들은 늘 그 소파에 앉아 기다린단다. 소파가 밤나무 밑에 있어 시원한 그늘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마을 앞 도로로 지나가는 차를 보기도 하고 그 차에서 혹 누가 내리는지 살피기도 하신단다. 결국 그 소파는 기다림의 소파인 셈이다. 하지만 신노인은 자신은 그렇게 준비하지 않는다 말씀하신다. 이제까지 내가 자식들에게 해준 게 얼만데 이젠 자식이 나에게 해주어야지 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미 집안 곳곳에 자식들에게 줄 쌀이며 말린 나물이 있는 걸 보았다.

비재에서 속리산까지는 14시간 이상 가는 거리여서 노인이 깨지 않게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조용히 일어난다. 하지만 이미 노인은 깨어 있었다. 내가 배낭을 꾸려 나가는 동안 노인은 먹으라고 주먹밥과 과일을 싸서 주신다. 차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주시는 그 손길을 뿌리칠 수도 없다. 눈물이 핑 돈다. 노인은 비재로 가는 이 킬로미터의 길, 멀리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어 주신다. 구부러진 길로 접어들어 노인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동이 트면서 밝은 오렌지 빛으로 빛이 나는 동관리 앞산의 바위를 보며 아버지 생각을 한다. 걸음마다 눈물이 떨어진다.

a 할머니

할머니 ⓒ 정성필


a 기다림 소파

기다림 소파 ⓒ 정성필


a 신노인댁 가마솥

신노인댁 가마솥 ⓒ 정성필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종주의 기록

덧붙이는 글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종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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