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그곳에는 짜밤나무가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 금오도의 짜밤산

등록 2005.09.14 12:48수정 2005.09.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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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전라도의 작은 섬이다. 여느 섬마을이 다 그렇듯 섬 곳곳이 낚시 포인트가 아닌 곳이 없고,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것의 대부분은 멋진 개울도, 아름드리 나무도 아닌 훈훈한 섬사람들의 인심이다.

일가 친척 하나 없어도 섬으로 들어온 이상 뜨신 밥에 맛난 찌개는 필수로 얻어먹고 가야 하며, 사시사철 흐르는 일급수로 목을 축이는 일은 옵션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몸이 허락하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귀뚜라미 울어대는 가을밤을 이불 삼아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럴싸한 민박집은 없다. 굳이 돈을 내고 민박을 하길 원한다면 섬택시를 타고 고개를 넘어 연락선이 닿는 큰마을로 나가든지 아니면 허덕허덕 산마루를 넘어서 좀 더 세련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다른 마을로 가야 할 것이다.

주경심
내 고향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섬마을을 지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우리동네는 그냥 우리동네라고 우기신다. 그런데 국립공원이 무엇이던가? 바로 나라가 지정한, 보호해야 할 자연자원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 자연자원 안의 공기며, 물을 자랑한다는 것은 섬마을을 모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섬마을! 그런데 대한민국 섬마을치고 이만한 조건 안 갖춘 섬도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이만한 조건이라면 굳이 기사라는 명목하에 고향을 소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짜밤'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우선 묻고 싶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 마을에는 짜밤이 있다. 추석이 지나면 제 스스로 알맹이를 털어내는 짜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종류들이 마을 끝에 위치한 작은 봉우리에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언제부터 그 나무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주경심
아마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맨처음 금오도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전부터 짜밤나무는 그곳에서 터줏대감으로 지내오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왜냐면 내 고향 금오도는 예전에는 사냥터였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한 지는 이제 12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오도 개척 백주년 기념행사 때 축하하기 위해 섬으로 내려온 모 국회의원과 악수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면 짜밤이 무엇인지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밤인지, 도토리인지…. 정확한 이름을 찾아보니 '구실잣밤나무'란다. 추석이 지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풀숲을 헤쳐가며 짜밤산으로 향했다. 가을 태양은 멀쩡하니 하늘에 떠 있는데 산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은 금세 비라도 내릴 듯 어두컴컴했다. 한줄기 햇살의 소중함을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다.


햇살이 비추는 곳을 찾아다니며 짜밤을 줍다보면 가끔 길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봤자 아래쪽은 바다이고, 윗쪽은 짜밤산이니 뛰어봤자 벼룩! 아니 길 잃어봤자 짜밤산! 이었다. 가마니대로, 빨간 망태로 채워진 짜밤은 먹는 방법 또한 중요했다. 밤처럼 삶았다가는 그 작은 알맹이를 꺼내기 위해 손톱이 적어도 두어 개는 빠져야 할 것이다.

주경심
짜밤은 통깨를 볶는 낡은 냄비에 넣고 기름 한 방울 두르지 않은 채 깨처럼 볶아야 했다. 타지않게 살살 저어주면 어느 순간 이게 팝콘인가? 아니면 제비나라 임금님이 선물로 주신 박속의 선물인가 싶을 정도로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짜밤이 제 속살을 드러내준다.


그러면 손톱을 이용해서 반쯤 열린 껍질을 벗겨내고 하얀 속알맹이만을 꺼내서 입안에 털어넣으면 된다. 물론, 가장 맛나게 먹는 방법은 한 개씩이 아닌 볼이 미어터지게 밀어 넣고 먹는 것이다. 짜밤을 줍다보면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자연의 신비 하나도 배울 수 있다. 짜밤은 해걸이를 하며 열매를 맺는데,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나 보릿고개 시절에는 해걸이를 잊은 채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그런데 보릿고개가 없어져서일까? 요즘엔 짜밤을 줍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마을을 휘돌아 짜밤산까지 가는 길이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버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노인들뿐이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마을 전체를 뒤흔들며 들려오던 깜부기 악동들의 염소치는 소리도, 누렁이가 들려주던 잔잔한 방울소리도 없어져버렸다고 했다.

100여년 전통을 간직한 초등학교는 이제는 학생이 없어 폐교 위기에 놓였다고 했다. 저출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아닌 섬마을의 학교와 섬마을에서만 건져올릴 수 있는 추억의 요소들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허연 궁둥이를 내놓고 볼일을 보는 아이는커녕, 마을에 아이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몇 해인지 셈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그러니 우리의 추억 일번지였던 짜밤산도 이제는 시간이 멈춰버린 늪처럼 바짝 엎드린 채 고향 마을을 내려보며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추억을 주워갈 깜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고향에 들렀을 때 먼발치에 바라다 뵈는 짜밤산을 사진 속에 담으면서 그런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에 가슴 한 쪽이 '쏴아' 쓰라려 왔다. 하지만 이곳에 글을 올리면서 추억 속에만 자리하고 있는 그 짜밤산을 소개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내 고향 그곳에는 짜밤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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