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을 발표하기 전, 울음을 참고 있는 존 브로그덴 전 자유당 총재.TWT제공
호주정계의 떠오르는 별이자 자유당의 희망이었던 존 브로그덴(John Brogden). 그는 1986년 17살에 자유당 청년회장에 당선돼, 96년 27살에 의회에 진출, 2002년 33살에 뉴사우스웨일스주 자유당 총재로 피선되는 등 호주정치계에 최연소 기록행진을 이어온 유망주였다.
그러나 그 승승장구하던 서른여섯의 젊은 야당총재는 한 달여 전에 불거진 성추행 추문이 8월 말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여론의 집중화살을 맞은 데 이어 지난 8월 29일에는 총재직에서 전격사임하고 8월 30일에는 자살까지 기도한 상태다.
한 달여 전에 존 브로그덴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그날 밤 힐튼 호텔에선 무슨 일이?
7월27일, 최장수 연임을 구가하던 노동당 소속 봅 카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가 전격 은퇴했다. 부인과 함께 느긋한 주말도 즐기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난공불락이었던 봅 카 때문에 10년 넘게 총선에서 연패를 당해야 했던 자유당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
야당 총재로서 집권의 꿈에 부풀어있던 존 브로그덴은 8월 5일 저녁, 힐튼호텔에서 열린 호주호텔협회 주최의 파티에 참석했다. 차기 총리가 확실시 되는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기에 바빴다.
웬만한 배우 뺨 칠 정도의 수려한 용모와 한순간에 좌중을 사로잡는 뛰어난 화술을 지닌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 무렵에 열렸던 그의 후원모임에 1000여명의 후원자들이 몰려들 정도였으니 그의 앞길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힐튼 호텔의 룸에서 열린 파티에서 이미 술이 거나해진 존 브로그덴이 호텔 아래층에 있는 <마블 바>로 내려온 시간은 밤 9시 30분 경. 그는 그의 테이블로 몰려드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였다. 술에 취해 터지기 직전의 풍선만큼이나 들떠 있었던 것.
문제의 발언은 그 때 터져 나왔다. 그의 농담에 좌중이 박장대소를 하는 순간,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열흘 전에 정계에서 은퇴한 봅 카 전 총리의 부인 헬레나 카의 이름을 거론하며 '우편으로 주문한 신부(mail-order bride)'라고 희화화한 것. 헬레나 카는 1965년에 호주로 이민 온 말레이시아 출신의 인텔리다.
좌중이 한동안 술렁거렸지만 그의 부적절한 언행은 계속됐다. 친근감의 표시라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데이 텔레그래프> 저스틴 페라리 기자의 엉덩이를 만진 것. 이어 그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처음 보는 <선 헤럴드>의 안젤라 커밍 기자에게 "오늘 밤에 함께 잘 수 있느냐?(Are you available tonight?)"라고 물은 것. 이런 식의 표현은 호주의 싱글 남자가 술집에서 여성을 유혹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존 브로그덴의 사과, 그리고 자살 기도
그러나 8월 5일 밤의 '대단한 파티'는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봉변을 당한 여기자들이 앞길이 창창한 존 브로그덴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고 용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기'라는 생각에 젖어있던 존 브로그덴은 그럴만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 이 사건은 존 브로그덴과 같은 당 소속인 자유당의 한 의원이 신문사에 정보를 흘림으로써 한 달여 만에 물위로 떠오르게 됐다.
안젤라 커밍 기자는 그날 밤의 일을 8월29일자 <선 헤럴드>에 상세하게 보도했다. 또한 그녀는 "장난이었을 뿐이다"라고 변명한 존 브로그덴에게 "나는 장난과 유혹을 분별할만한 충분한 나이"라고 쏘아붙였다.
같은 기사에 의하면, 존 브로그덴은 커밍 기자에게 수작을 걸 당시 그녀가 기자인줄 몰랐다고 한다. 술집에서 남자의 유혹을 기다리는 여자인 줄 알았다가 그녀의 신분을 알아차리고는 사색이 되어서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봅 카 전 총리에게 사과하는 존 브로그덴 전 야당 총재.TWT제공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존 브로그덴은 8월 28일 밤,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전화를 걸어 "헬레나 카에게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부적절한 조크를 한 사실을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봅 카 전 총리 내외는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당장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그의 인종차별 발언은 아시아 출신 여성 모두에게 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8월 29일, 결국 존 브로그덴은 "봅 카 전 총리 부부에게 거듭 사과한다"는 말로 시작된 총재직 사퇴연설을 통해 "나는 정치리더로서 명예롭지 못한 언행을 했다, 나는 지금 사퇴를 통해서 명예롭게 행동해야 할 순간에 있다"면서 울먹였다.
승승장구하던 한 정치인의 몰락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8월 30일 밤, 그와 관련한 또 하나의 긴급뉴스가 전해졌다. 총재직에서 사퇴한 존 브로그덴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자살을 기도해 의식불명의 상태로 발견된 것. 그는 다행히 자살기도 직후 직원에게 발견돼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깜짝 놀란 봅 카 전 총리는 "처음엔 너무 화가 나서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젠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부디 빨리 회복해서 과거를 잊고 미래로 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론도 젊은 정치인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선에서 동정론 쪽으로 흘렀다.
▲8월 30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의 두가지 표지. 스캔들 폭로(상)와 자살 뉴스(하).
한편 8월 30일 아침,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또다시 존 브로그덴의 얼룩진 과거를 폭로하는 기사 2탄을 톱으로 실었다. 그가 2003년 주 의사당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2명의 여기자에게 "우리 셋이 그룹섹스를 하자"고 꼬드겼다는 치명적인 뉴스였다. 그러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그의 자살소식을 접한 직후 2판부터는 자살뉴스로 톱기사를 대체했다. 이런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태도에 대해 언론사에서는 정치인의 사생활 보호와 독자의 알권리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상태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존 브로그덴의 이미지는 깨끗한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정치인의 사생활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높지 않은 호주였지만 존 브로그덴은 깨끗한 이미지를 트레이드마크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하룻밤의 실수로 존 브로그덴의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해 버렸다. 9월 15일 오전, 극보수파인 찰리 린, 데이비드 크라크, 프레드 나일 의원 등 10여명은 뉴사우스웨일스 주 의사당에서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등을 성명을 발표하면서 존 브로그덴 전 총재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의 사생활을 들먹이기도 했다.
한편 언론사에 정보를 흘린 사람으로 지목받고 있는 극단적 보수주의자 데이비드 클라크 뉴사우스웨일스 주 상원의원은 존 브로그덴의 자살소동 이후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미지와 본질은 다르다. 정치인의 도덕성은 쉽게 포장되지 않는 본질이다."
| | 깨끗한 사생활을 요구받는 호주 정치인들 | | | 최근 10년간 사회문제화 됐던 주요 스캔들 | | | | 호주 국민들은 자국의 정치인들에게 강도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의원으로써 많은 특권을 누리는 대신 그만한 도덕성을 갖추라는 것.
지난 1997년 5월에 발생한 멀 콜스톤 상원 부의장의 여행경비 과다계상 사건은 호주의회가 국민의 혈세인 돈 문제에 관해서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그는 의회행정부서에 제출한 43일간의 여행경비 지출보고서에 약 490만 원을 과다계상 했다는 이유로 부의장직은 물론 14년 동안 재임해온 의원직까지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렸었다. 그 사건 직전에 보브 우드 상원의원(자유당 소속)과 마이클 코브 상원의원(국민당 소속)도 여행경비 과다계상과 관용승용차의 사적인 이용이 문제가 되 전격 사임한 바 있다.
세 의원은 모두 행정비서관들의 폭로로 비리가 들통 났다. 호주연방형사법 29D조에는 이런 행위에 대해 최고 1만 호주달러의 벌금과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명시돼있다.
특히 사법부와의 공조 아래 정치 스캔들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호주 언론의 치열함이 국민들의 큰 호응을 받으면서 부패한 정치인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피츠제럴드 특별위원회에 기소된 러셀 하인즈 퀸즐랜드 전 총리는 위증죄까지 겹쳐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다가 죽음으로 사건을 끝낼 수 있었다.
1997년 10월 2일, 잘못 계상한 여행경비 22만원 때문에 자살을 기도한 닉 셰리 전 상원의원은 '마지막 보도자료'라는 제목의 유서를 호주통신(AAP)에 발송한 채 손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했다가 절명직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지금 내 이름은 진흙투성이다. 나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린 지금 죽음밖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중략) 끝으로 호주정치인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일한다." -닉 셰리 전 상원의원의 유서 일부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이유는 집권당 코스텔로 재무총리로부터 "그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라는 조롱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닉 셰리 의원은 41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에서 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차세대 주자여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떠오르는 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2000년 신년벽두에 불거졌던 '호주정가의 혼외정사 논쟁' 건도 있다. 신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던 존 앤더슨 전 부총리가 "정치인들의 혼외관계를 용서할 수 없다. 다음 선거를 통해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한 후보들은 걸러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촉발된 논쟁은 과도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호주정치인들의 스캔들 대부분이 이성문제와 얽혀서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여행경비를 잘못 청구해 유죄판결을 받았던 자유당 소속 보브 우드 전 의원은 혼외정사를 위한 주말여행을 의정활동을 위한 여행으로 위장 기록했다가 들통이 났다. 국민당 소속 마이클 코브 전의원도 이혼한 전처를 방문하여 로맨스를 즐기다가 100만원이 채 안되는 공금을 유용한 죄로 실형을 살았다. 의원직을 상실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 | | | |
덧붙이는 글 | 기사의 내용 중에 과거에 보도된 <주간동아>의 기사가 인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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