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 사르는 초연

[한라산 자락에서 띄우는 가을편지] 낙엽

등록 2005.09.15 02:18수정 2005.09.1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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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햇살 따사로운 가을이 오면 잎새들은  나무를 떠나기 위해 온몸을 사른다.

햇살 따사로운 가을이 오면 잎새들은 나무를 떠나기 위해 온몸을 사른다. ⓒ 오희삼

홍자색 억새꽃이 제주 들녘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한라산엔 고운 단풍이 백록담에서 산 아래로 남하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싱그럽고 푸르기만 하던 숲에는 점점이 빨간 물감을 찍어놓은 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침에는 한둘이던 점들이 저녁에는 어느새 서넛으로 늘고, 다음날 아침이면 그 점들이 새끼를 치듯이 늘어나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는 사이 어느 새 등 뒤로 다가선 손님처럼 가을은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나무와 풀들은 가을이 오면 잎새들을 모두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메마른 대지와 건조한 대기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가지의 잎새들을 모두 떨궈내야 합니다.

뿌리의 수분과 태양빛을 마시며 나무의 자양분을 생산해내던 자신의 분신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쳐야만 하는 나무의 심정인들 오죽하겠습니까. 그 아픈 가슴만큼 줄기 속에 나이테 한 금 더 새기고 그리움의 크기만큼 한 가닥의 뿌리를 늘이는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가을이면 스스로 고개를 숙이며 열매를 맺는 겸손을 체득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a 산개벚지나무의 단풍. 순백의 꽃으로 봄의 시작을 알렸던  벚나무는  가을에도 부지런하여 가장 먼저 물든다.

산개벚지나무의 단풍. 순백의 꽃으로 봄의 시작을 알렸던 벚나무는 가을에도 부지런하여 가장 먼저 물든다. ⓒ 오희삼

나무의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이층(離層)'이란 게 있더군요. 나뭇잎과 줄기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분을 가지 끝의 잎사귀에 공급하고 잎들이 광합성으로 생산한 영양분을 나무로 보내주는 일종의 관문 역할을 합니다.

가을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해져오고 메마른 날씨가 계속되면 나무들은 이층에 장벽을 칩니다. 겨울 수면을 위해 꼭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을 줄기에 저장해 놓습니다. 그래야 혹독한 겨울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새 잎을 틔울 부활의 봄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요.

수분 공급이 끊어지면 푸르던 잎새들은 나날이 야위어갑니다. 나뭇잎들은 가을의 눈부시고 따사로운 햇살에 자신의 몸을 태웁니다. 햇살에 그을린 잎들은 푸르던 초록의 옷을 벗고 스스로를 물들입니다. 나무에 따라서 붉게도 물들이고 노랗게도 물들이고 갈색으로도 타오릅니다. 어쩌면 색깔들의 경계를 허물며 세상의 모든 빛으로 물드는지 모릅니다. 이런 잎새들이 모이고 모여 만산홍엽을 이루는 것이겠지요.


a 담쟁이덩굴의 단풍이 빚어내는 색의 스펙트럼은 노랑에서 빨강까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담쟁이덩굴의 단풍이 빚어내는 색의 스펙트럼은 노랑에서 빨강까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 오희삼

이층이 단절되어 물기를 잃은 나뭇잎은 서서히 말라갑니다. 줄기에 들러붙은 이층이 단 한 장의 나뭇잎조차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면 나무는 과감히 잎새를 떨구어냅니다. 해서 이층을 '떨켜'라고도 하지요. 아니 줄기가 떨구기 전, 단풍잎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를 버려야만 살아남을 나무의 마음을. 차라리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는 비장한 심정으로. 떨켜를 떠난 잎은 낙하합니다. 단말마(斷末魔)의 비명도 없이. 낙엽이지요.


나무를 원망하지도 스스로 서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계절의 시련 앞에서 낙엽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바람 따라 허공을 흐르다가 자신을 키워준 나무 그늘에서 생명의 흙 속으로 아름답게 소멸해 가겠지요. 먼 훗날 흙 속에서 또 다시 나무를 살찌우는 부엽토가 되어 환생하겠지요.

a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치 영주십경 중 영실기암의 가을 서정.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치 영주십경 중 영실기암의 가을 서정. ⓒ 오희삼

낙엽의 이별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연어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엄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낙엽의 장렬함을 비웃지는 못할 테지요.

낙엽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를 사르는 초연(超然)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단풍 곱게 물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초연하게 소멸해가는 낙엽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오면 유독 계절 타는 이들이 많아지고 실바람에도 흩날리는 낙엽 앞에서 대상 없는 그리움에 젖는 것은 부활을 예비하며 고결하게 소멸해가는 낙엽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a 양지꽃 잎새에 물드는 단풍.

양지꽃 잎새에 물드는 단풍. ⓒ 오희삼

흩날리는 나뭇잎 한 떨기에도 가슴이 젖어오고 구름 한 점 없이 시퍼런 하늘을 보며 울렁거리던 심장의 떨림을 느껴본 적 없으신지요. 가슴 한켠에 곰삭힌 설움들이 한꺼번에 차올라 눈물로 솟아난 적은 없으신지요. 가을은 그렇게 소리 없이 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가는 시작도 끝도 경계도 없는 신기루만 같습니다.

한라산엔 오늘도 단풍 붉게 물들며 낙엽들이 바람에 한 잎 한 잎 날립니다.

a 소나무 줄기를 타고 가녀린 줄기를 뻗은 잎새에도 가을이 물든다.

소나무 줄기를 타고 가녀린 줄기를 뻗은 잎새에도 가을이 물든다. ⓒ 오희삼

덧붙이는 글 |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소리(www.jejusori.net)에도 실린 글입니다.

사진은 작년 9월 말과 10월 초 어간에 찍은 것들입니다. 추석이 지나고 곧 들이닥칠 가을을 만나는 기분으로 정리한 것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소리(www.jejusori.net)에도 실린 글입니다.

사진은 작년 9월 말과 10월 초 어간에 찍은 것들입니다. 추석이 지나고 곧 들이닥칠 가을을 만나는 기분으로 정리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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