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나를 '야세중독자'라 말하지만

절약하려면 이민자가 '야세족' 되는 건 필연

등록 2005.09.23 00:00수정 2005.09.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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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형적인 야드세일 모습

전형적인 야드세일 모습 ⓒ 한나영

"야, 이게 도대체 얼마니? 껌 값도 안 되네."
"엄마, 이건 더 싸. 두 개에 5센트야."


"얘, 그럼 뭘 망설이니? 두 개 더 가져와라. 네 개라고 해 봐야 10센트다. 100원 밖에 안 돼. 그런데 왜 가만있어? 정말 싼데…."
"엄마, 벌써 많이 샀어. 이제 그만 사!"

"다 합쳐봐야 돈 만 원도 안 되는데 …. 얘, 저 쌍촛대 멋있다. 그거 소영이 주면 좋겠다. 그리고 저 향기 나는 포푸리는 정우네 선물로 주면 좋겠고, 그리고…."
"엄마, 제발 그만! 엄마는 '야세족'이야. 야세중독증 환자라고."


'야세중독증'에 빠지다

'야세중독증'은 무엇인가. 아마도 '쇼핑중독증'이란 말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금세 눈치를 챌 것이다. '야세중독증'은 미국의 중고품 세일 시장인 '야드 세일'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야드족' 혹은 '야세족'의 중독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처음부터 '야세족'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야드 세일 같은 재활용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쇼핑이라고 하면 나도 당연히 새 것을 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말하자면 귀족(?)인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나 역시 물건이 필요하면 집 근처의 쇼핑센터만을 찾곤 했다.

그런 내가 '야세족'이 되어 야세중독증에 빠지기 시작한 건 모든 중독의 시작이 그러하듯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었다.


a 우리집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집은 상습적으로(?) 야드세일을 연다.

우리집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집은 상습적으로(?) 야드세일을 연다. ⓒ 한나영

지난 7월에 미국에 도착한 우리가족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야 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대형 할인 매장이 두 개나 있어서 물건을 사러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한 장의 '야드세일' 전단이 우리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처음 찾아간 야드세일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필요한 '살림'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장만할 수 있었다. 새 것을 사려면 그 비용의 2배, 아니 3배 이상은 줘야했기 때문에 '야드세일'은 그야말로 우리의 구세주였다. 그런 재미에 푹 빠져버린 우리는 토요일마다 열리는 야드세일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물건을 사는 것뿐 아니라 물건에서 느낄 수 있는 주인의 취향이나 관심, 성격 따위를 엿보는 것 역시 호기심이 많은 나에게는 물건 이상으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또한 우리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물건들이 '거침없이' 나오는 야드세일의 현장은 우리와는 또 다른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런 재미에 푹 빠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야세족'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금요일 밤이면 토요일에 있을 야드세일을 기대하며 잠들곤 했다. 결국 우리는 토요일만 되면 야드세일을 헌팅하러 다니는 '충성 헌터'가 되고 말았다.

'싼 게 비지떡?' 그 말은 한국속담일 뿐

우리는 해리슨버그 시내를 익힌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지도를 보면서 동네를 일주했다. 물론 속셈은 달콤한 유혹인 '야드세일'를 찾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a 개인이 운영하는 상설알뜰시장인 'Hess' 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개인이 운영하는 상설알뜰시장인 'Hess' 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 한나영

a 상설 알뜰시장인 'Salvation Army Thrift Store' 내부

상설 알뜰시장인 'Salvation Army Thrift Store' 내부 ⓒ 한나영

3달러짜리 드라이버 세트, 50센트짜리 쌍둥이 동촛대 2개, 1달러짜리 이태리산 꽃병, 페르시아풍 쟁반 1달러, 등이 네 개 달린 키 큰 램프 5달러, 책상용 램프 2달러, 중고품이 아닌 완전 새 것인 주방용 도마 세트와 채칼 세트 10달러, 프라이팬 세트 3달러 등등.

'싼 게 비지떡'이라는 우리말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야드세일에서 '건진' 물건 가운데에 비지떡은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바로 구형 소니 VCR이었다. 처음 찾아간 야드세일에서 영화광인 남편의 눈은 바로 10달러짜리 태그가 붙어있는 VCR에서 멈췄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남편은 머릿속으로 먼저 '원'을 떠올렸다.

"단돈 만 원인데…."

만 원짜리 VCR을 보자 남편은 그만 침을 흘리고 말았다.

"작동만 된다면 너무 싸지 않아? 물건이야 제대로 되니까 내놨겠지. 살까?"
"TV도 없는데 VCR만 사면 뭐 해?"
"TV야 나중에 사고 우선 싼 VCR이 나왔으니 먼저 이거부터 사자. 너무 싸잖아."

a 상설 알뜰시장인 'Salvation Army Thrift Store'

상설 알뜰시장인 'Salvation Army Thrift Store' ⓒ 한나영

한국에서 돈 만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많지 않다는 걸 남편은 잘 알고 있는지라 별 고민 없이 '작동이 잘 된다'는 말만 듣고 단박에 VCR을 샀다. 물론 물건보다는 '단돈'에 무게를 둔 쇼핑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잘 아는 이웃의 미국 친구가 TV와 VCR을 공짜로 주었다. 물론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반납하라는 느슨한 조건을 붙여서 말이다. 새로 받은 VCR은 우리가 샀던 것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작은 사이즈로 신형 모델이었다. 하지만 신형 모델도 지금은 소용이 없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케이블이 들어오지 않아 VCR은커녕 TV와 인터넷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단돈' 10달러가 아니라 '거금' 10달러를 주고 산 소니 VCR은 지금 창고에 처박혀 있다. 난 그 물건을 볼 때마다 남편에게 괜한 돈을 썼다고 입을 내밀지만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우리도 야드세일하면 저런 거 다 처분할 수 있어. 그러니 걱정 마."

아, 귓전을 울리는 은밀한 유혹이여!

야드세일을 다니면서 그동안 꽤 많은 물건들을 샀다. 물론 당장 필요해서 산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값이 싼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엄마는 야세증독증!"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산 물건들도 꽤 있다.

예뻐서, 아니면 언젠가는 필요할 거라는 대책 없는 예상으로,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많이 샀다. 물론 값이 비싸다면 결코 사지 않았을 물건들이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티끌이 모이다 보니 그만 태산이 된 느낌이다. 물론 가계를 거덜 낼 만큼 큰돈을 썼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샀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이 바닥(?)을 떠나려고 결심을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결심을 해도 언젠가 갔던 상설 알뜰시장의 주인 할머니 목소리가 은밀하게 나를 유혹한다.

"이곳에 자주 들러 봐요. 당신이 찾는 바로 그 물건이 나오니까요. 이 행운을 놓치지 말아요.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자주 이곳을 들러 보세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Don't give up!"

아, 귓전을 울리는 은밀한 유혹이여!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외쳐대는 내 얄팍한 지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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