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구두를 닦았습니다

신발을 사주는 대신 러닝셔츠와 구두약을 꺼냈습니다

등록 2005.09.20 10:30수정 2005.09.2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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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때 마땅히 신을 만한 신발이 없네!"


추석 장보기를 위해 아내가 집을 나서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가족들 입을 것,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나면 항상 아내 자신은 뒷전입니다. 아이들이나 내가 입을 것은 그래도 매장에서 사지만 자신의 옷이나 신발은 시장 손수레에서 살 때가 많은 모양입니다.

아내의 신발을 사줄 수 있을지 지갑을 보니 얄팍합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시 "시장에서 싸구려 신발이나 사 신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는 아내의 낡은 구두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구둣솔과 구두약, 낡은 러닝셔츠를 찾아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솔질입니다. 구둣솔에 구두약을 약간만 묻혀 힘을 주어 구두전체를 고루, 빡빡 문지릅니다. 하얗게 색이 바래거나 변한 부분은 몇 번 솔질을 거치면 새까맣게 됩니다. 구두닦이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빠르게 여러 번 솔질을 하거나, 가벼운 솔질 후 여성용 스타킹으로 싹싹 문지르면 빛이 나는데, 이것을 '솔광'이라고 부릅니다. '솔광'만 내어도 그런대로 신을 만합니다.

그 다음은 구두약 바르기입니다. 가운데 두 손가락에 구두약을 찍어서 덧칠을 합니다. 이 때에도 처음에는 듬뿍 찍어 바르다가 점차 조금씩 묻혀 부드러움을 맨 살갗으로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닦습니다. 특히 광을 내는 앞부분은 여러 번 손길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약이 충분히 스며들게 그늘에 한참을 말립니다.


이 때에도 구두약을 듬뿍 바르고 불(그 당시는 주로 라이터를 이용하였음)에다 조심스럽게 구두를 구우면(갖다 대면) 구두약이 녹으면서 광이 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불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불광'은 쉽게 낼 수는 있지만 금방 빛이 죽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물광'을 내야 할 차례입니다. 군에서 구두 닦을 때는 침을 퉤퉤 발랐지만 나는 구두약 뚜껑에 물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하얀 무명천(아이들 기저귀가 좋은데 없어서 찢어진 러닝셔츠를 이용했습니다)을 두 손가락에 꽉 조이게 감아서 물에 담급니다. 그리고 구두전체가 펴질 수 있도록 아들에게 아내의 신발을 신겼습니다.


a 완성된 구두

완성된 구두 ⓒ 한성수

"아버지가 군대 생활할 때 말이야! 구두 닦는 데도 서열이 있었단다. 군인들이 신는 군화를 모아서 가져오는 사람을 '찍새’라고 하고, 이렇게 여럿이 모여서 구두를 닦는 사람을 '딱새'라고 불렀단다. 네 생각은 누가 더 높은 것 같니?"

"아무래도 일이 쉬운 '찍새'겠지요. 그런데 왜 '찍새'라고 불렀어요? 아버지는 딱새만 했어요?"

아들의 질문이 연거푸 쏟아집니다.

"구두 닦는 사람들을 보면 길거리를 다니면서 '구두 딱'이라고 외치고 다니면서 구두를 찍어(거두어) 온다고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참 생활만 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은 제 엄마의 신발이 작아서 불편한 표정이 역력하지만 잘 참아 줍니다. 나는 물이 묻은 헝겊을 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앞부분의 표면을 문지릅니다. 처음에는 물기가 사방으로 번지지만 여러 번 계속하면 물기가 없어지고 조금씩 광이 납니다. 그러면 다시 구두약을 헝겊에 살짝 발라 물을 조금 묻혀서 문지릅니다.

구두코 쪽(앞부분)에 광이 나면 옆부분과 뒤축 쪽도 문질러서 완성을 합니다. 예전에는 동료들과 '다방에서 구두코를 레지(종업원) 치마 밑에다 대면 속살을 비춰 볼 수 있다'고 호언하곤 했는데, 세월을 따라 무디어진 탓인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벌써 반오십 년이 지났으니까요. 아내는 신발을 보고 활짝 웃습니다. 나는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겨서 정리를 합니다.

추석날 아침, 아내는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섭니다. 그러나 아내의 발에는 무심하게도 여름에 신던 샌들이 신겨져 있습니다. 내가 볼이 부은 채로 아내의 발을 쳐다보자, 아내는 "옷하고 구두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라며 말꼬리를 흐립니다.

그러나 언젠가 아내가 저 구두를 신을 때는 한번쯤, 이 무능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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