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아마추어 DJ 클럽' 축제 벌이던 날

등록 2005.09.20 22:11수정 2005.09.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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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 우리 집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좁은 의미에서는 남편이 대학에서 만든 음악 동아리 선후배들이 만남을 갖는 자리였지만, 우리 폐교의 넓은 마당에서 그들의 벌인 이벤트는 축제라고 할 만했다.


덥수룩한 뒷머리를 목 뒤로 넘기는 과장된 몸짓과 가성이 가득한 목소리로 작은 다방 한 구석에서 여학생들이 보낸 사연을 읽으며 신청곡을 소개해주는 모습에 향수를 느끼면 7080 세대일 것이다. 우리 남편이 바로 그런 디스크 자키 출신이다.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공부는 뒤로 한 채 음악 다방의 DJ로 보낸 사람이란다.

혼자 음악을 좋아하다가 같은 뜻을 가진 후배들을 모아서 학교에 ‘아마추어 DJ 클럽’이라는 서클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그 클럽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1년에 한 번 매년 선후배, 재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친목도 도모하고 발표회를 해오던 것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 받는 남편이 올해는 비교적 큰 집(?)에 사는 우리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많이 준비할 거 없어, 그냥 대충 삽겹살이나 구워먹기로 했어.”
“몇 명이나 오는데?”
“40 명 정도.”
“뭐!!!!”

진작부터 내 눈치를 보며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 뭔 음모가 있다 싶었다. 남편은 날짜가 닥쳐서야 40명의 식사를 내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을 털어 놓았다.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DJ에 대한 동경도 없는 나로서는 40여명에게 저녁을 해 먹이는 부담만 떠안았을 뿐이었다. 사회적으로 발이 넓은 남편을 둔 아내의 '오지랖의 끝'은 어디일까.

우리 집에서 벌인 아마추어 DJ클럽 발표회의 마지막을 불꽃놀이로 장식했다.
우리 집에서 벌인 아마추어 DJ클럽 발표회의 마지막을 불꽃놀이로 장식했다.오창경
토요일 오후, 서울에서 여수까지 방방곡곡에 흩어져 사는 80~90년대 아마추어 DJ들이 속속 우리 집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시절 도끼 빗을 배꼽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장발 머리 깨나 휘날리고 다녔을 DJ들은 이제 회색 머리칼이거나 휘날릴 머리카락도 부족한 중년의 모습들인 것이 격세지감에 젖게 만들었다.

LP 판이 가득 꽂힌 다방 한구석 뮤직 박스 속의 ‘DJ 오빠’를 알까 싶은 2000년대 학번들이라는 재학생들이 휘젓고 우리 폐교를 다니자, 금방 활기가 돈다 싶더니 어둠이 내린 마당 한가운데에 여러 개의 전구가 달리기 시작했다. 전구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왔고 황량하기만 했던 우리 폐교가 도심의 네온 불빛이 부럽지 않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 속에 자리를 만들고 숯불을 피우자 DJ들의 축제의 밤이 시작되었다.


한 쪽에는 나무 단을 쌓아서 캠프파이어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준비까지 해놓았다. 40명의 아마추어 DJ들 사이에는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사실 친구들이 한 둘씩 찾아오기 전까지 내 속은 툭하면 일을 벌여서 나를 힘들게 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간신히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밥 때가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밥을 하는 내 손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시골에 살다보니 어느 새 나한테도 ‘밥 좀 먹고 가’ 하는 시골 정서가 어느새 배었는지 찾아온 손님들에게 제대로 못 먹여 보낼까봐 오히려 내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이었다.

“형수님, 오늘 여기 오려고 점심까지 못 먹어 가면서 왔습니다. 음식이 참 맛 있네요.”


이런 너스레 한 마디에 내 뭉친 마음도 어느 새 풀어져버려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가마솥에 한 밥이에요. 많이 드세요’ 하며 밥을 한 술씩 더 퍼주고 있었다. 밥하기에 정신을 쏟다보니 우리 집 마당에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은 미처 듣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음악이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디제이들답게 음향 시설까지 준비해서 음악 감상의 추억을 살려 놓은 것이었다.

그 순간,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가 간수실 문을 잠그고 LP 판을 틀어주자 온 감옥의 죄수들이 감격에 겨워 입을 다물지 못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쇼생크 감옥에서 마른 풀처럼 살아가던 죄수들 머리 위로 단비처럼 쏟아지던 모차르트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나는 한동안 그 쇼생크의 죄수들처럼 넋 나간 듯이 음악 속에 서 있었다. 그러자 시골 폐교에 갇혀서 문화생활에 목말랐던 내 감성이 촉촉이 젖어 오는 것이었다.

“네, 이번 곡은 이 폐교의 안주인이자 우리의 영원한 큰 형님인 80학번 ○○형의 부인에게 바치는 곡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맛있는 만찬을 준비해 주셨죠. 이 자리를 빌어서 형수님께 이 음악을 통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곡은 특별히 ○○형이 선곡을 해주셨습니다. 가장 흔한 말보다는 존 덴버의 ‘You are my sunshin’으로 가슴 속에 숨겨뒀던 말을 대신 하겠답니다.”

중저음이 멋진 DJ 멘트가 흐르자 나를 향해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그윽한 멜로디가 나를 향해 쏟아지다가 우리 폐교를 감싸고돌았다. 8년을 살았지만 남편에게 그런 로맨틱한 ‘DJ 오빠’의 면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날 처음 알았다. 사연과 추억이 담긴 음악이 가을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그렇게 우리의 폐교의 하늘을 수놓았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삶에 치이고 지쳤던 내 감성에도 고운 별빛이 다시 내려앉았다.

“팝송 한 곡으로 내가 당신의 그 오지랖을 용서할 것 같아?”
“당신이 좀 봐줘야지. 어떻게 해.”
“그럼 내년에는 음반 좀 많이 준비해서 우리 집에서 아마추어 DJ 클럽 발표회를 제대로 하면 안 될까? 동네 사람들도 다 모셔다 놓고….”

8년을 함께 살다보니 오지랖 남편에 나도 그 아내가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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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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