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안개와 물안개가 하나로 어우러지고...김은주
다른 나무들과 경쟁 않고 물에서 살기로 한 '왕버들'
어쨌든 나는 혼자서 내 고향 청송엘 가끔 다녀온다. 고향 마을에선 지금도 사촌오빠가 농사를 짓고 있지만 대개는 그냥 혼자 조용히 주왕산이나 주산지에 들렀다가 돌아오곤 한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꼬박 6시간이 걸리는 곳인데, 지금도 주산지를 처음 만났던 그 해 가을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이 처음 열린 곳이 바로 거기인 것처럼 신비로운 곳, 주산지의 왕버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 자라는 그 어떤 나무들보다 장엄한 생명력을 안고 서 있었다.
주산지는 주왕산 국립공원 서남쪽에 있는 못인데, 1720년 숙종 46년에 만들기 시작해 그 이듬해에 공사를 마친 인공호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곳에 갇힌 물과 나무들은 인공의 냄새를 완전히 잃고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땅으로 거듭났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여기에서 용이 나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지만, 지금도 근처 60가구의 농사를 책임지고 있는 저수지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집 온 후 30년 동안, 아무리 가물어도 주산지의 물이 가물어 농사를 짓지 못했던 해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해 주던 민박집 아주머니 말이 떠오른다.
1만 평에 이르는 주산지는 주왕산 연봉에서 뻗어 나온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싸여 한없이 고즈넉하다. 주산지가 가장 아름다운 시각은 아무래도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 전이다. 온통 하얀 산안개, 물안개가 어우러져 천상의 한 자락을 보여 주는 순간, 150살이 넘은 왕버들이 물에 기대 초록으로 반짝거리는 그 찰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이제 막 새 잎을 올리는 어린 버들부터 썩어 가는 고목까지,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굵기와 모양을 보여 주는 왕버들이 물 속에서 자라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참나무나 소나무에 비해 특별한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 나무라 숲에서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고 물에서 살기로 작정한 왕버들의 결정은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 왕버들 줄기를 마구 쪼면서 주산지의 아침을 깨우는 딱따구리 소리조차 고요 속에 묻혀 사라지는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앉아 있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