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앗아간 그 여름의 참외

등록 2005.09.21 14:00수정 2005.09.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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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아침. 며칠 전 내린 비로 가게 앞 화단에 풀이 한 뼘은 자라 보였다. 가게 안 청소를 마치고 화단에 풀을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풀 속에 참외 넝쿨이 턱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참외를 심지도 않았는데.

다음 날부터 참외넝쿨은 내 발소리를 들으며 잘 자랐다. 바닥을 기는 줄기를 옆에 심어져 있는 자그마한 나무 위로 올려 주었다. 꽃도 피고 열매도 맺기 시작했다. 농촌 출신인 나지만 매일 이렇게 가까이서 참외가 크는 것을 보지 못했던지라 참 신기했다.


아침마다 물밖에 주지 않았는데 잘도 자란 것은 아마도 지난해 가을, 쓸어모은 낙엽들이 거름으로 작용한 것 같다. 게다가 우리 가게에 왔던 손님이 참외 순을 자른 뒤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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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10cm, 15cm, 20cm로 계속 커져가자 참외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참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큰 참외는 본 적이 없다. 보는 사람들마다 놀랐다. 한동안 참외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자 한편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참외를 따가거나 따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참외를 나무 속에 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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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참외를 숨기려고 나무를 들추는데 나무 속에 큰 선물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외 하나가 나무 속에 또 하나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숨기려는 참외보다는 작았지만 이것도 족히 15cm 정도는 되어 보였다.

8월의 뜨거운 햇빛과 폭풍우를 잘 견뎌내고 '나는 참외다'라는 것을 보여주듯 나무 속에 숨겨져 있던 참외가 노란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와 아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냥 두고 보자고 했고 아내는 진짜 참외인지 확인도 하고 맛도 보자는 것이었다.

'또 참외가 있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에 결국 아내 생각대로 하기로 했다. 아내는 가위로 정성스럽게 꼭지를 잘랐다. 수돗물에 참외를 깨끗이 씻고 칼로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오이 냄새가 났다. 아내는 '오이라 이렇게 컸나'라고 중얼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윽고 참외는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참외를 반으로 자르려고 하는데 지켜보는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참외 속에 씨가 들어 있지 않고 뭔가 다른 것이 들어 있을 것 같은 황당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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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참외는 두 조각 났고 잘 여문 씨만 들어 있었다. 한 조각을 먹으려고 입 가까이에 가져갔는데 이번에는 참외 냄새보다는 다 익은 노란 호박 속 냄새가 났다. 상큼한 맛은 있었지만 별로 달지도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노랗게 익어 보였지만 아직 덜 익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 사랑을 독차지했던 남아 있는 참외도 점점 노란색을 띠며 익어갔다. 아내와 나는 이 참외는 끝까지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참외가 맛도 없었지만 없어진 참외 자리가 많이 허전해 보여서다. 진한 노란색으로 변해 가는 참외는 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이 참외를 가지고 갑론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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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지금 먹으면 정말 맛있을 거라며, 조금 더 놔두면 속창이 상해 못 먹는다는 사람과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맛있다는 사람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그 참외는 얼마 안 되어 처참(?)하게 생을 마쳤다.

아내 말에 의하면 옆 가게에 온 손님 아이가 통나무 토막으로 참외를 깨서 가져가는 것을 나중에서야 봤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 차에 타고 있는 아이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별 말 없이 휙 가버리더라고 했다. 아내는 속상했지만 가지에 달려있는 참외 맛이 궁금해 속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는데 정말 달았다며 내게 화단에 가보라고 했다.


속창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줄기에 얼마 남지 않은 참외가 달려 있었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뒤로 하고 남아 있는 참외를 먹어 보았다. 사각사각하며 당도도 뛰어났다. 먼저 먹어 보았던 참외하고는 맛이 전혀 달랐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씨들을 땅 속에 묻었다. 행여나 내년에 다시 만나길 기원하며.

참외 넝쿨을 걷었다. 그간 힘들었는지 나무가 기지개를 편다. 겉 자란 나뭇가지들을 전지가위로 잘라냈다. 추석 전 벌초한 묘지처럼 동그란 가지들이 가지런하다. 어느새 가로수 은행나무 이파리들도 마치 참외가 익어가듯 노란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연은 항상 그렇듯 변해가며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준다. 올 여름 참외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가을이다. 점점 깊어 가는 올 가을엔 인생 중년을 배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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