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차례상 차리기, 많이 익숙해졌어요

어머니, 이제는 마음 놓으셔도 괜찮아요

등록 2005.09.23 13:12수정 2005.09.23 16:3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3년 5월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가 시댁에서 맞이하는 명절날 아침 풍경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님 제사가 없었던 때에는 손위 형님과 저는 이른 아침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고 한복으로 갈아입느라 바빴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하루 전날 준비해 놓은 여러 가지 나물들을 무치고 볶느라 정신없이 바쁩니다.

탕국도 끓이고, 족히 30인분의 밥은 거뜬하게 지을 수 있는 커다란 전기밥솥에 코드만 꽂을 수 있도록 쌀도 앉혀 놓습니다. 안방에서 제기도 꺼내다가 행주로 깨끗하게 닦아 놓고, 여러 가지 과일도 씻어서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 놓습니다.

그런 후에야 형님과 저는 씻고 화장하고 한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우리 시댁은 집안에서 제일 마지막 순서인 세 번째에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먼저 집안의 큰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갑니다.

지난 설날까지는 두 집에서 먼저 차례를 지내고, 시댁에서는 맨 마지막인 세 번째 차례를 지내고 나니 시계는 낮 12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에는 첫 번째 차례를 지내던 집의 아재께서 건강이 많이 나빠져, 아버님께서는 두 번째 차례를 지냈던 큰집부터 참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추석날 아침 첫 번째 차례를 지내고 나면, 대부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물과 탕국을 한데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맛나게 먹습니다.


모두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던 터라 적당하게 시장기를 느꼈던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비빔밥을 비벼서 서둘러 먹습니다. 다음 집으로 또 차례를 지내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차례 음식의 대부분을 준비해야 하는 집안의 며느리들도 큰 집, 작은 집 며느리 할 것 없이 커다란 양푼에 최소한 5인분의 비빔밥을 만들어서 한자리에 모여 앉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양푼을 가운데에 두고 행여 밥을 흘릴세라 왼손으로 숟가락 밑을 받쳐가며 부지런히 밥을 먹습니다.


서둘러서 설거지를 하고 다음 집으로 차례상을 차리러 가야하는데, 형님과 저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서도 차례를 지내게 되면서 10년 넘게 해왔던 설거지 당번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습니다.

큰집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시댁으로 달려와서 미리 닦아놓은 제기에 준비해 놓은 여러 가지 음식을 부지런히 담습니다. 남편과 시숙은 병풍을 꺼내어 차례상 뒤로 세워 놓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차례상에 순서에 맞추어 음식을 차려 놓습니다.

행여 빠뜨린 음식은 없는지 다시 한번 차례상을 잘 살펴보고 나서야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한자리에서 줄 지어 서서 술을 따르고, 정성스럽게 큰절을 올립니다.

그렇게 이번 추석 차례도 아무런 탈 없이 무사히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형님은 차례상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떼어내어 물밥을 말아 밖으로 나가고, 저는 다시 커다란 상 두 개를 펼쳐 놓습니다.

여러 가지 과일과 고기가 담긴 접시를 챙겨야 하고, 앞집에서 식사가 부족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나물과 밥도 차려 놓습니다. 우리 시댁을 끝으로 명절날 아침에 치르는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처럼 편안한 자세와 마음으로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주고받습니다.

차례에 참석했던 집안 친척들이 모두 돌아간 후, 차례상 정리와 부엌 설거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형님과 저는 어머님 산소에 성묘를 가기 위해서 과일과 음식들을 챙깁니다.

큰 집 가족과 우리 집 가족, 그리고 아버님과 함께 시댁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어머님 산소를 향해서 출발을 합니다.

제일 먼저 형님네 가족들이 앞장을 서고, 저의 남편이 딸이 그 뒤를 따르고, 아버님과 아들이 손을 잡고 갑니다. 저는 아버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길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탱자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탱자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한명라
어린시절 고향의 저의 집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봄이면 새순이 올라오는 탱자나무 울타리에도 하얗게 탱자꽃이 피어나고는 했습니다. 꼭 새끼손가락 크기 만한 연두색 애벌레가 제법 커다란 뿔을 자랑하면서 탱자나무 가지 위를 기어 다니고는 했는데, 그 애벌레가 호랑나비 애벌레였다는 것은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를 오랜만에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아들아이에게 저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잘 모른다고 합니다. 아들아이는 아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탱자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멘트 벽돌 담 밑에 잘 가꾸어진 꽃밭
시멘트 벽돌 담 밑에 잘 가꾸어진 꽃밭한명라
슬레이트 지붕 위로 올라가는 호박넝쿨
슬레이트 지붕 위로 올라가는 호박넝쿨한명라
조금 더 걷다보니 시멘트 벽돌담 밑으로 작은 꽃밭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농사를 짓느라 많이 바빴을 터인데도 꽃밭을 가꾸어 놓은 부지런한 손길과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와 닿아서 담을 타고 지붕을 뒤덮은 호박넝쿨과 함께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멀리 가운데쯤 보이는 언덕에 어머님의 산소가 있습니다.
멀리 가운데쯤 보이는 언덕에 어머님의 산소가 있습니다.한명라
논의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멀리 언덕 가운데 부분에 어머님의 산소가 있습니다. 오른쪽의 높다란 둑 저편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둑 밑의 길을 따라서 저희 가족들은 어머님을 만나러 갑니다.

함초롬이 피어 있는 들꽃
함초롬이 피어 있는 들꽃한명라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한명라
저수지 둑 밑의 길옆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분홍빛의 들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습니다. 수풀 속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도 탐스럽습니다.

손자와 자식들의 벌초로 예쁘게 단장한 어머님 산소
손자와 자식들의 벌초로 예쁘게 단장한 어머님 산소한명라
드디어 어머님의 산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가족들이 정성껏 벌초를 해 놓았기에 산소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산소 위로는 어느새 풀이 자라 있습니다. 마치 어머님의 머리가 자라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오른쪽 산소에 어머님께서 잠들어 계시고, 왼쪽 산소는 아버님의 가묘입니다. 언제인지 몰라도 어머님이 가신 길을 따라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머님과 나란히 사이좋게 잠이 드실 자리입니다. 어머님 산소 하나만 외롭게 있는 것보다 든든해 보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의 발걸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 줍니다.

이제 준비해 간 음식과 과일, 떡을 차려 놓습니다. 자식들은 다시 한번 술 한잔 따라 올리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집에서 차례를 지낼 때에 작은 며느리인 저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했지만, 어머님의 산소에서는 저 혼자서 술 한 잔 따라 올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저 혼자 두 번 큰절을 올리는 짧은 순간에 그동안 어머님께 다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려 드렸습니다.

방아꽃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나비
방아꽃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나비한명라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길 옆에는 보랏빛의 방아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어디서들 날아왔는지 많은 나비들의 화려한 날갯짓이 어지럽습니다. 방아잎은 장어국이나 추어탕을 끓일 때 넣어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부침개를 만들어 먹을 때에도 방아잎을 넣으면 그 맛이 정말 좋습니다.

시멘트 벽돌 담장 위를 뻗어 나가는 수세미 덩쿨
시멘트 벽돌 담장 위를 뻗어 나가는 수세미 덩쿨한명라
호박꽃이 아니고 수세미꽃입니다.
호박꽃이 아니고 수세미꽃입니다.한명라
성묘를 가는 길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담장 위의 풍경이 정겹습니다. 담장 저편의 마당에 피어 있는 장미꽃들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과 오랜만에 보는 수세미 넝쿨이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올라 간 모습은 전형적인 고향의 풍경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번 추석은 가족들과 어울려 별 탈 없이 잘 보냈습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한 준비와 꼼꼼한 살림솜씨를 자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님께서는 애써 두 며느리를 믿으시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숨기지 않으시고는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두 며느리들은 벌써 두 번의 추석 아침과 설날 아침을 보냈고, 두 번의 어머님 제사도 지냈습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맞았던 첫 번째 추석 때, 형님과 저는 처음으로 차례상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머님께서도 저희들보다 더 마음을 졸이면서 두 며느리들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나름대로 명절맞이에 익숙해지면서 '나 혼자보다는 형님과 둘이서 힘을 합하여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구나'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마 어머님께서도 두 며느리들이 오손 도손 모여 앉아 명절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이제 너희들은 마음을 놓아도 되겠구나'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실 것 같은, 그런 마음 뿌듯한 추석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들려 드리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3. 3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4.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5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