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엄마, 아버지조명자
추석명절 음식준비를 하시는 엄마를 돕기 위해 며칠 일찍 올라갔습니다. 추석 전 날은 시댁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엄마를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녀간에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즐겁게 부엌일을 하던 중 엄마가 느닷없이 냉장고 타령을 하시지 뭡니까.
"얘, 수지네가 문 두 짝짜리 냉장고를 샀다고 하더라. 유행 지난 것은 싸게 살 수 있다고 하던데 우리도 냉장고 바꿀까? 개수만 두 개지 냉동실이라고 좁아터져서 들어가는 게 별로 없다니까."
제사나 명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엄마의 고정 메뉴입니다. 작은 냉장고가 둘, 김치 냉장고 하나. 냉장고만 해도 벌써 3개입니다. 평소에는 헐렁헐렁 하다 제사나 명절, 고작 일 년에 4번 정도 만원사례가 되는 냉장고를 못 참아 새 냉장고를 구입하고 싶다는 우리 엄마. 참, 철딱서니 없는 손주들이나 늙으신 할머니나 떼쓰는 수준은 비슷비슷합니다.
"엄마, 문 두 짝 자리도 더 많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야. 냉장고가 멀쩡하게 돌아가는 데 뭐하러 바꿔요?"
"반상회 때 집집마다 돌아다녀도 문 한 개짜리 냉장고 쓰는 집은 우리밖에 없더라. 낡은 것이 두 개나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까 정신만 사납고. 내 통장에 냉장고 살 돈 정도는 들어 있는데 그 거 찾아 이 참에 새 걸로 개비할까?"
비교적 맏딸 눈치는 살피시는 양반인데 이번엔 그도 없습니다. 정신없이 서두시는 모습이 아예 얘기 꺼낸 김에 재빨리 바꿔버릴 요량인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내 인내심에 한계가 왔습니다. 당신 코 앞에 앉은 딸년도 십오륙 년이 넘은 낡은 냉장고에다가 남이 내다버린 작은 냉장고까지 주워 와 희희낙락 끌어안고 사는데 이 양반의 허영심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엄마, 정신 사납다고 새 걸로 바꿔요? 참, 통장에 몇 천 만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거 조금 있다고 급하지도 않은 살림 장만한다고 난리를 치시면 어떡해. 엄마, 아버지 번갈아 병원 나들이 하시는데 언제 갑자기 큰 돈이 들어갈 줄 알아? 정신 들락날락 하시는 아버지만 쳐다보면 걱정이 태산인데. 저러다 정신을 완전히 놓으시면 어쩌나 하고..."
다른 건 별반 욕심이 없는데 유달리 살림에는 욕심이 많은 엄마입니다. 잔돈푼이라도 생기면 평소에 사고 싶었던 그릇이나 가구 그리고 앙증맞은 액세서리 완구들을 사다 찻장바닥에 죽 늘어놓고 즐거워하십니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사시는 거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더 이상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엄마의 취미생활에 매번 제동을 거는 악역은 내 담당입니다. 다른 자식들 얘기는 콧방귀도 뀌지 않으니까요.
몇 년 전에도 우리 엄마 취미생활 막느라고 너무나 고생했습니다. 동네 할머니들과 어울려 날이면 날마다 약장수한테 출근을 했지 뭡니까. 휴지나 냄비 그리고 어느 땐 작은 압력솥도 얻어 왔습니다. 약 선전만 들어주면 아무 것도 사지 않아도 선물을 준다는 것이 엄마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물건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간 나쁜 아들 위해 보약도 구입해 왔고, 자궁근종 수술 앞둔 작은 딸에게 먹일 영양제도 구입해 왔습니다. 엉터리 성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야단을 하는 자식들 원성도 마이동풍이었습니다. 오히려 믿지 못하는 자식들을 향해 사정없이 역정을 내기가 일쑤였지요.
"너희들은 때국놈을 닮았냐?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 나는 무식해서 그렇다치지만 선생 한 똑똑한 할머니도 잘만 사더라. 많이 배운 사람들이 진짜, 가짜도 구별하지 못할까 봐."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선생이라고 믿는 우리 엄마 항변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를 설득하는 임무 역시 내가 맡았습니다.
"엄마, 우리들은 모두 간이 나쁘잖아. 그런데 모든 약에는 다 독이 들어 있거든. 몸 속에 들어 온 독을 간이 해결해야 하는데 무리하게 자꾸 독을 집어넣으면 어떡해. 결국 기능이 좋지 않은 간만 자꾸 악화시키는 꼴이 된단 말이야. 간이 튼튼한 사람은 아무 약이나 먹어도 끄떡없지만 간 나쁜 사람은 약 먹는 것을 그래서 조심해야 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