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저수조의 메두사, 신화의 죽음일까? 부활일까?

[터키7박8일 여행기 7] 지하 물저장소 '예레바탄 사라이'

등록 2005.09.26 07:13수정 2005.09.2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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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재활용된 336개의 그리스신전의 기둥이 인상적인 지하저수조의 모습

재활용된 336개의 그리스신전의 기둥이 인상적인 지하저수조의 모습 ⓒ 김정은

식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물 저장소 예레바탄 사라이

이스탄불은 2천년 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당시부터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도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서 발생한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바로 식수문제였을 법하다.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이미 이들은 물 부족 해결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북쪽에서 19km 정도 떨어진 곳의 강물과 지하수를 끌어와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수도시설과 유사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요즘처럼 동력펌프도 없었던 그 당시, 어떻게 물줄기를 낮은 곳에서 높은 지대의 성까지 이동시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은 바로 성 소피아 성당 옆에 있는 지하물저장소, 예레바틴 사라이(Yerebatan Saray)의 존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풀 수 있었다.

터키어로 '지하의 궁전'이란 뜻의 예레바틴 사라이는 A.D. 532년 유스티아누스황제가 도시의 용수공급을 위해 만든 거대한 지하물저장소이다. 가로 140m, 세로 70m의 크기에 8만㎡의 물을 가득 저장할 수 있다는 거대한 규모의 이 물 저장소가 그 시절 존재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추정된다.

첫째는 수로를 통해 끌어들인 물을 이곳에 가득차게 저장시켰다가 한꺼번에 물을 내보냄으로써 수압차 조절을 통해 높은 지대까지 용이하게 식수가 공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이거나 도시가 포위되어 수로공급이 차단됐을 때 물이 부족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물저장 탱크의 용이다. 옛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a 여행객들이 저수조 물속에 던진 동전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

여행객들이 저수조 물속에 던진 동전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 ⓒ 김정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 가보면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어두운 지하 공간이 나온다. 그러나 조명을 받은 336개의 커다란 돌기둥들이 우뚝 솟아 있는 물저장소의 모습은 생각 외로 화려하다. 그뿐인가? 관광객들이 사라지고 조명이 꺼지면 다시 깜깜한 어둠으로 되돌아갈 이곳에도 생각지 못한 생명체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바로 관광객들이 물 속으로 던진 동전 사이를 유유하게 수영하는 이름모를 물고기의 존재이다.

초록색 물때가 낀 저수조안의 메두사


a 우아한 조각이 인상적인 코린트양식의 기둥들

우아한 조각이 인상적인 코린트양식의 기둥들 ⓒ 김정은

저수지를 잘 돌아 볼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들어진 통로를 통해 끝부분을 가면 대리석 기둥 아래 거꾸로 또는 옆으로 세워져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한 초록색 물 때 낀 메두사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괴물이기 이전에 화를 잘내기 좋아하는 그리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된 수많은 불쌍한 희생물 중 한 명이다.

a 지하저수조에 거꾸로 쳐박힌 메두사 머리(1)

지하저수조에 거꾸로 쳐박힌 메두사 머리(1) ⓒ 김정은

괴물 메두사는 고르곤 세 자매 중의 1명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눈 장소가 하필이면 근엄하기로 유명한 아테네의 신전이었다. 이들의 정사장면을 우연히 보게된 아테네 여신은 신성한 자신의 신전에서 음란한 행동을 한 메두사에 격분해 그녀에게 저주를 내려 머리 한 올 한 올을 뱀으로 변하게 했다. 또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돌이 되는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메두사의 자매들도 괴물로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두 자매에게는 흉측한 모습과 함께 불사의 생명을 주었지만, 유독 메두사에게만은 불사의 생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불사의 생명을 얻지 못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채 또다른 그리스 신화의 영웅만들기 내지는 아테네 여신의 방패 장식품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페르세우스와 메두사

그러나 메두사 베기에 성공해 영웅이 된 페르세우스 또한 아폴로 신탁에 의해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신탁 결과를 무서워한 아크리시오스왕은 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동 밀실에 딸을 가두었는데 이전부터 다나에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제우스 신이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청동밀실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놀란 왕은 그 모자를 방주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냈는데 그 방주가 정착한 세리포스의 왕의 명령으로 실시한 여러 가지 모험 중 하나가 바로 메두사 머리를 베어오는 것이었다.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 영웅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오려던 페르세우스는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원반을 던졌는데, 그 원반이 우연하게도 페르세우스가 온다는 소문에 피신해왔던 할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왕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아폴로 신탁은 잔인하게 실현되었다.

부적의 의미로 사용된 메두사

이처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화도 잘내서 후회할 짓들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들을 친근하고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들의 노여움에 의해 언제든지 신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화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 시절부터 부적의 의미처럼 건축물에 조각되어지곤 했는데 메두사의 경우도 방패나 문짝, 사원 꼭대기 등에 새겨 넣어 부적이나 제의적인 마스크로 자주 이용했다.

a 옆으로 서있는 또다른 메두사 얼굴 (2)

옆으로 서있는 또다른 메두사 얼굴 (2) ⓒ 김정은

지금 지하저수조 물 속에 거꾸로 세워져 있는 메두사 머리를 보니 이런 물 저장소에 처박히게 된 사연이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메두사의 상징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하 저수조에 거꾸로 파묻었다고도 하고, 식수로 사용되는 물 저장소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1999년 1월 26일 나는 터키의 옛수도 이스탄불 지하저수고에서 한 고대종교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중략) 고대에 만들어진 그 지하 물탱크에서 본 고대종교의 죽음은 그 종교가 살게 될 새로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그러나 지하 저수조의 메두사가 고대 그리스 종교의 죽음일지는 모르지만 2000년이 넘는 현대를 살고 있는 여행자에게 메두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들었으니 이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그리스 신화의 부활이 아닐까? 이스탄불의 마지막 밤은 그리스 신화의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과 함께 조용히 저물어갔다.

덧붙이는 글 | 터키7박8일 여행기 7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터키7박8일 여행기 7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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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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