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쓰세요

제자들의 편지를 받고 감동하다

등록 2005.09.26 18:06수정 2005.09.2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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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인가 보다
멀리 떠난 제자들이 편지를 보내 오는 것을 보니...


6학년 졸업으로 내 곁을 떠나간 제자들이 편지를 보내는 계절은 스승의 날을 빼고 나면 언제나 초가을이었다. 그것도 남학생보다는 여학생들이 색깔도 고운 편지지에 여고생다운 필체로.

힘든 고등학생의 길을 가면서도 아직도 옛 선생님을 잊지 않고 보내는 편지를 받을 땐 그 날 하루 내내 감동의 물결이 나를 감싸 안아 준다. 아직도 아이들에게 잊혀진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바쁜 중에도 마음을 나눌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제자들의 고운 마음씨에 또 감동하곤 한다.

사랑을 전해 온 제자들의 고운 편지들
사랑을 전해 온 제자들의 고운 편지들장옥순
아직도 이렇게 편지를 손으로 써서 보내는 제자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전자우편이나 문자메시지로, 전화 한 통화로 소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기특한데 직접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서 배달된 색이 고운 편지를 보는 것이 귀해서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가을 탓인지도 모른다. 옆구리에서 일렁이는 찬바람을 느끼게 하는 가을 때문이다. 이른 알밤들이 길 가에 튕겨 나와 자동차 바퀴에 깔려서 널브러진 산길을 오르면 벌써 찬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짧은 가을 해를 붙잡으며 감이 익어가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차츰 목소리를 낮추는 요즈음. 삼십 명이 넘던 6학년 학급에서 가을 운동회를 준비하던 일, 부채춤을 가르치느라 힘들면서도 한 뼘씩 키가 커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기쁨을 찾던 일들도 이젠 추억 속으로 들어가고 내 곁에 없다.


아이들은 이제 숙녀로 멋진 청년으로 그들이 가야 할 길 위에서 바쁜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으리라. 공부라는 울타리 속에서 날마다 책과 씨름하며 가을이 오는 것도 계절이 바뀌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모습들이 안쓰럽다.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이 아프다. 그렇게 달렸어도 먼 길 돌아와 보면 별 것이 아닌데.

고생스럽게 고집스럽게 글쓰기를 강요한 내 욕심 때문에 글쓰기에 재능을 인정받아 교내 백일장을 주름잡는다는 편지를 받을 때는 내 가슴도 설렌다. 마치 내가 상을 탄 것처럼. 아이들에게 나는 늘 일방적인 약속을 하곤 했다. 먼 후일에 다시 만나는 날, 각자 자기의 자서전을 들고 만나자고.


'마음이 나누어주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로빈 세인트 존의 말은 한 치도 틀림이 없음을 실감한다. 아이들의 마음 밭에 뿌려진 씨앗이 옹골차고 잘 여문 것일수록 싹트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기어이 파릇한 잎을 내고 겨울도 잘 이겨내는 걸 보게 된다.

제자들에게 답장을 쓰는 손끝이 가벼운 떨림으로 나를 감싼다. 가을은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할테니, 나를 사랑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사랑하며, 그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이 가을이 내게 전하는 말씀이다.

이 순간을 사랑하는 일,
이 시간을 사랑하는 일,
내게 주어진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가을은 그러라고 나를 불러 세운다.

아직도 나는 가을 편지를 쓸 수 있을 만큼 푸르다.
내 의식은 녹색이니 가을보다는 여름이다.
가을은 '갈' 준비를 하라며 내게 부지런하라 이른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잠에 들지도 않고 나를 일으켜 세운다.

덧붙이는 글 | 바쁘게 살아가는 제자들이 한 번쯤 눈을 들어 이 가을의 푸르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제자들에게 답장을 씁니다. <한국교육신문> <웹진에세이>에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바쁘게 살아가는 제자들이 한 번쯤 눈을 들어 이 가을의 푸르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제자들에게 답장을 씁니다. <한국교육신문> <웹진에세이>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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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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