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령 넘지 못하고 '갈천약수' 맛에 젖어

[명물 약수 찾아 떠난 여행1]양양 미천골 갈천약수 오가는 길에 만난 추자

등록 2005.09.27 08:00수정 2005.09.27 16:42
0
원고료로 응원
갈천약수는 사이다 맛이다. 사철 변함없는 물 양과 물맛. 한적하여 가을 여행지로 그만이다.
갈천약수는 사이다 맛이다. 사철 변함없는 물 양과 물맛. 한적하여 가을 여행지로 그만이다.김규환

산나물 씨 따러 가다

추석 전 산나물 관련 방송 촬영을 3회로 나눠서 찍었다. 2회 차에 방문한 '강원도산채시험장'에서 씨앗을 채취해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 주 간신히 시간을 내서 봉평에 다녀왔다. 막상 가보니 산채시험장 내 '산채유전자원보존포'는 마구 헤집어져 있었다.


갈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애초에 논이었던 자리라 1~2m 이상 꺼진 곳으로 산나물을 전시하고 유전자를 좋은 형질로 보존하기 어렵도록 바닥에 물이 고이는 지형이었다. 더군다나 100가지가 넘는 소중한 나물은 서로 경계를 넘나들어 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개원 몇 년 만에 동산을 만들어 전시할 계획인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하지만 씨를 따가라는 약속을 했으면 미리 전화라도 한통 해주지 그랬나 싶어 섭섭했다. 뿌리가 뽑히고 한데 엉겨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아쉬웠다. 직원도 미안한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캐가라고 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너 시간 뿌리를 캐고 종자를 채취할 수 있는 건 작은 봉지에 담았다. 내 작은 차에 50여 가지를 3가마에 나눠 실었다. 채종 가짓수도 300여 가지나 돼 뿌듯했다.

올해만 산채시험장에 4번 갔으니 당분간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제대로 만들어지면 한번 보고 귀향 후 산나물공원을 만들 때 참고할 계획이다.
올해만 산채시험장에 4번 갔으니 당분간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제대로 만들어지면 한번 보고 귀향 후 산나물공원을 만들 때 참고할 계획이다.김규환

내친 김에 오대산을 넘어 주문진까지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걸 더하면 120여 가지가 넘는다. 주요 산나물을 수집하는 일을 1차로 마감해도 되겠다. 2~3년 잘 키워 활용하면 되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실로 1년도 안 된 사이 나물 공부도 많이 하게 되었고 확보한 가짓수도 만만치 않다.


서울서 내려간 우린 내친 김에 오대산 진고개를 넘어 강릉 주문진까지 가기로 했다. 애초 계획은 씨앗만 받고 가평 유명산 <산채원시험포지>로 가서 곧바로 이식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능이버섯을 따기로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바닷바람을 쐬고 가자는데 흔쾌히 동의하였다.

잔뜩 기대를 갖고 오랜만에 찾은 주문진항. 을씨년스럽게 비가 쉴 새 없이 내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상인들이 단합대회를 갔단다. 여독을 풀 겸 반주를 곁들일 식당도 찾기 힘들었다.


평창에서 자생식물원과 월정사 숲을 옆에 두고 진고개를 넘고야 말았다. 주문진에 도착해 비를 흠뻑 맞고 말았다.
평창에서 자생식물원과 월정사 숲을 옆에 두고 진고개를 넘고야 말았다. 주문진에 도착해 비를 흠뻑 맞고 말았다.김규환

버섯의 유혹과 갈등

한곳을 찾아 간신히 저녁을 먹고 비를 철철 맞으며 이동을 하는데 옷가게 처마 밑에 버섯과 토종달걀이 놓여 있었다. 싸리버섯은 익히 아는 사이고 까마귀 털처럼 까맣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야들야들한 미역귀버섯을 만났다. 두 가지 버섯 3000원 어치를 사며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이런 버섯이 어디 있느냐고 노인께 여쭈었다.

구룡령에서 인제쪽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즐비하다고 하신다. 또다시 노선을 수정해야할 지도 모른다. 맥주 안주로 두 버섯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바로 꺼내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싸리버섯은 옛 맛 그대로고 미역귀버섯은 질긴 고무를 씹는 맛이다.

얼마 전 평소 다니던 가평에 능이버섯이 나온다기에 산에 올라 몇 시간을 헤매 한 송이 두 손바닥만한 걸 따서 푸지게 먹었지만 내 몸은 여전히 버섯을 달라고 조른다.

미역귀버섯(까마귀버섯, 고무버섯)과 싸리버섯을 데쳐서 맥주 안주를 삼았다.
미역귀버섯(까마귀버섯, 고무버섯)과 싸리버섯을 데쳐서 맥주 안주를 삼았다.김규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송이 취재 계획

양양출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주문진인데 내일 아침 갈천약수를 마시고 구룡령을 넘으려고 하는데 가다가 뭐 좋은 구경할 수 없을까?"
"곧 양양 송이축제가 있을 건데요."

"송이를 아무나 따나. 취재라도 하게 사람 좀 소개시켜주라고. 밀린 일은 조만간 처리할 것이구만."
"현북면 아는 할아버지 연락처를 드릴게요."

술을 적당히 마시고 잠깐 차에서 눈을 부치고는 새벽 5시가 되기 전 차를 몰았다. 아침부터 전달받은 연락처로 몇 번을 걸어도 어딜 가셨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양양읍내를 지나자 촌로가 배낭에 점심을 챙겨 지고 걸음을 재촉한다.

"할아버지, 저 서울서 왔는데요, 송이 따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다 있드래요. 나는 오색으로 갑니다."
"그럼 할아버지 뒤 좀 따라가면 안 될까요?"

그 다음 답은 들을 수 없었다. 구부정하지만 황소걸음이다.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총총 사라지고 말았다. 저런 걸음이라야 송이 한 개라도 딸 성 싶었다.

인제군 남성들이 건강가게 오래 산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쉬지 않고 산에 오르니 관절이 강해지고 심폐기능이 탁월해짐은 물론 온갖 약초와 버섯을 먹으니 오래살 수밖에 없질 않겠나.

구룡령 오르기 전엔 갈천약수 입구에서 바라본 구름에 가린 숲. 원시림 그 자체다.
구룡령 오르기 전엔 갈천약수 입구에서 바라본 구름에 가린 숲. 원시림 그 자체다.김규환

미천골로 방향을 선회하다

송이는 무슨? 애초 팔자에 경동약령시에서 눈요기나 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속이나 풀 겸 미지의 땅 갈천약수로 접어드는 56번 국도를 따라 깊은 내륙으로 빨려들어 갔다.

양쪽으로 울울창창 소나무가 곧게 뻗어 있다. 소나무 향이 은근히 배어나오는 듯하다. 비는 더 은밀히 내리며 우릴 숲으로 안내했다. 미천골 하늘아래 마지막 동네라 했던 유홍준 교수 뒤만을 따르는 건 아니다.

수년 전 숲을 배울 때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참나무에 피나무, 가래나무, 엄나무, 다릅나무 원시림 속에서 운해(雲海)에 빠져 동해를 굽어본 적이 있질 않던가. 그 숲엔 버섯의 으뜸 1능이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반길 테니 서두르자.

가래를 추자라고 한다. 호두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속 열매는 길쭉하다. 1킬로 미터 오르는 동안 계곡은 온통 가래나무다. 겨우내 까먹을 생각하면 즐겁다.
가래를 추자라고 한다. 호두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속 열매는 길쭉하다. 1킬로 미터 오르는 동안 계곡은 온통 가래나무다. 겨우내 까먹을 생각하면 즐겁다.김규환

약수터 가는 길에 만난 가래 열매

오늘은 약수터마저 개점휴업인가. 숲에서 뿜어내는 김이 자욱하여 앞이 보이질 않는다. 숯을 굽고 있는 걸까? 아니다. 신선이 여름에도 싸늘하여 오들오들 떨면서 젖은 나무로 군불을 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뱉어내는 숲의 기운에 콱 막혔던 콧구멍이 뻥 뚫렸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나를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제부터는 아이도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1km를 가면 약수터가 있다. 초입에 들어 요모조모 살피는데 나뭇잎이 밤새 많이도 떨어져 있다. 어디서 본 듯 한 커다란 잎이 널려 있다.

갈증이 더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뭔가 발에 밟히며 톡 볼가져 나온다. 그래 맞아 가래다. 난 가을에 추자(楸子)씨를 만났다. 개복숭아라 착각할 정도로 자그맣다. 가래나무에 달린 열매다. 누구라도 첫인상은 못생긴 호두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 쌍에 100만원이 넘는 장흥 귀족호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는 법이 없듯 우린 돌을 주워 내리쳤다. 젖빛 살이 골을 따라 골고루 퍼져 있다. 고소한 단백질이 씹혔다. 개암을 못 먹었던 올 여름에 더 좋은 횡재를 하였다. 밟히는 게 가래였고 보이나니 가래나무였지만 내려오면서 줍기로 하고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몇 백 미터 더 오르자 물소리에 새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붉게 물든 갈천약수를 가려면 56번 국도를 찾으면 된다. 홍천 쪽에서는 고개가 끝나는 지점이고 양양 쪽에서는 휴양림을 지나 마지막 휴게소 앞에서 우회전한다.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아 오염이 되지 않았다.
붉게 물든 갈천약수를 가려면 56번 국도를 찾으면 된다. 홍천 쪽에서는 고개가 끝나는 지점이고 양양 쪽에서는 휴양림을 지나 마지막 휴게소 앞에서 우회전한다.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아 오염이 되지 않았다.김규환

갈천약수 라면 맛도 죽인다

약수터까지 가는데 땀이 날 멀고 험한 거리가 아니다. 아직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약수를 맘껏 즐기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물기 젖은 추자를 드그득 굴리며 4년 만에 다시 약수에 다가갔다.

약간 붉은 빛이 돌았다. 한 모금 떠서 마셔보니 사이다 맛이다. 먹어본 이력이 있어 목 넘김이 수월했다. 주독이 남아 연거푸 대여섯 잔을 마셨다. 약수가 흐르는 길목에 어찌나 독하던지 도롱뇽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숙취엔 국물이 최고인지라 라면을 끓이기 위해 맑은 계곡수가 있는데도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약수를 퍼 담았다. 열을 가하자 처음부터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끓는 게 아닌가. 끓는 속도도 보통 물보다 훨씬 빨랐다. 면을 넣고 스프를 넣자 넘치기 일보직전이다.

국물을 떠먹어보니 고추나 매운 것을 아무 것도 넣지 않았는데도 매캐할 정도로 매운맛이 더해졌다. 라면국물이라기보다 얼큰한 육개장이다.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도 덜어냈으니 깔끔하다. 면발은 더 이상 불지를 않고 쫄깃하다. 광천수에 라면국물까지 먹으니 속이 확 풀리고 미끈한 느낌마저 싹 가셨다.

물을 담아 5초 후에 벌써 뽀글뽀글 끓는다.
물을 담아 5초 후에 벌써 뽀글뽀글 끓는다.김규환

눈이 펄펄 내리면 약수통 들고 다시 오르리

주변을 돌며 가래를 줍고 있는데 함께 간 사람은 커피를 끓인다. 같은 컵라면도 직접 솥에 끓이면 맛이 더 좋듯 커피도 마찬가지다. 내 청에 따라 팔팔 끓는 물에 커피를 넣으니 하얗던 솥이 까맣게 탄 듯하다. 커피 누린내도 나지 않고 낙엽이 타는 듯 향기가 진하게 퍼진다. 세상에 이보다 값싼 속풀이가 있을까 싶다.

물통에 약수를 담고 10분 여 가래를 한 자리에서 1관을 넘게 주워 담아 내려와 보니 뒷바퀴 타이어 한쪽이 주저앉아 있다. 비포장도로를 조심히 내려와 긴급출동을 부르니 산골짜기까지 친절하게 와서 푸념하나 않고 펑크를 때워주고 간다.

다소 시간을 허비하여 점심때가 다가오는데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가 말동무가 필요하신 모양이다. 집에 가서 요기라도 하고 가라고 한다. 다음에 눈이 펑펑 쏟아지면 꼭 찾아뵙는다고 하니 마지못해 놓아주셨다. 군불을 때주겠으니 꼭 오라는 다짐까지 하신다.

올 겨울 휴양소까지 얻다니. 꼭 시간을 내 눈 속을 헤치며 약수통 들고 맘 놓고 며칠 푹 쉬고 오리라. 그 댁 뒤뜰엔 진짜 호두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송이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오늘 구룡령을 넘을까 모르게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니 어쩔거나.

껍질을 깐 가래(추자)를 어느 때고 약수터 앞 휴게소에 가면 살 수 있다.
껍질을 깐 가래(추자)를 어느 때고 약수터 앞 휴게소에 가면 살 수 있다.김규환

올 겨울 눈이 사람 높이 오면 찾아뵙기로 하고 한 컷 찍었다. 홀로 자식들을 다 키우셨단다.
올 겨울 눈이 사람 높이 오면 찾아뵙기로 하고 한 컷 찍었다. 홀로 자식들을 다 키우셨단다.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