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오묘한 우리의 소리

[여든 일곱살 노악사가 들려주는 우리음악 3]

등록 2005.10.01 15:38수정 2005.10.0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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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17일부터 현재까지 기자가 국악 원로이신 해금 연주자 일초(一超) 김종희(87) 선생님과 가야금 연주자 동은(桐隱) 이창규(87) 선생님을 취재한 르포르타주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연주에 몰입한 이창규 선생의 모습.
연주에 몰입한 이창규 선생의 모습.심은식
시작을 알리는 장구소리가 울리고 짧은 침묵이 지나간다. 이어지는 음악에서 만 87살. 동은 이창규 선생의 손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꽉 찬 음들을 펼쳐 보인다. 각각의 다른 악기들도 세월을 뛰어넘어 어우러진다. 하얀 명주실, 말총, 대나무, 가죽, 오동나무 등등 온전히 자연에서 얻어진 재료들이 사람의 숨결과 손짓에 따라 울리는 소리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등을 곧게 펴게 하는, 정결한 서늘함과 떨림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불 없이도 환히 빛나고 있었다. 지난달 처음 이창규 선생의 연주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다.


배우고 이겨나가는데 분주했던 이왕직 아악부 시절

지난 토요일 방배동 자택에서 예전 사진들을 보여주시는 이창규 선생.
지난 토요일 방배동 자택에서 예전 사진들을 보여주시는 이창규 선생.심은식
선생은 1918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지난 기사에서 다루어진 일초 김종희 선생과 같은 청운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이사를 하면서 창신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형편상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노악사분의 소개로 이왕직 아악부에서 관비로 중고등 과정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험에 응한 결과 1931년 합격해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5년간의 수업 기간중 1, 2학년 때는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기본 악기로 당피리, 향피리 등을 배웠다. 학년말에는 악곡을 적은 제비를 뽑아 연주해 시험을 치렀다.

피리 수업을 받는 아악부 연수생들.
피리 수업을 받는 아악부 연수생들.김종희 제공
그리고 3학년 때부터 각자의 전문 분야를 정해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등을 다루게 된다. 당시 학생들은 악기를 선택할 수 없었고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재능과 적성을 살펴 정해준 악기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며 배웠다고 한다.

4기생의 가야금반 수업 - 맨 왼쪽이 이창규선생, 가운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스승인 함화진 선생이다.
4기생의 가야금반 수업 - 맨 왼쪽이 이창규선생, 가운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스승인 함화진 선생이다.이창규 제공
악기를 배울 때 즐거움이나 어려운 점은 없었냐는 질문에 선생은 곡을 배우고 이겨나가는데 분주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나마 우리 때는 구음과 함께 악보를 통해 배웠지만 이전의 1,2기 선배들은 오로지 구음과 선생님의 연주만 보고 배워야 해서 더 어려움이 컸어요."

하지만 선생은 이처럼 악보를 통해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악보를 보고 그 음을 소리 내는 것은 단지 기술일 뿐 음악이 갖는 그 깊이는 (악보를 통해)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라 아무래도 악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전 기수 선배들의 연주와 자신들의 연주에서조차도 다름이 있었다고 선생은 말했다.


이왕직 아악부 4기생의 졸업연주 사진 - 사진 위쪽에 박연의 초상이 걸려있다. 세종 때 아악을 도입하는 등 궁중음악을 정비한 박연을 기념하는 초상이 걸려있었으나 청사 이전 도중 망실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왕직 아악부 4기생의 졸업연주 사진 - 사진 위쪽에 박연의 초상이 걸려있다. 세종 때 아악을 도입하는 등 궁중음악을 정비한 박연을 기념하는 초상이 걸려있었으나 청사 이전 도중 망실 되었다고 회고했다.이창규 제공
"그렇게 도합 5년을 공부하고 나면 성적에 따라 정식 아악수가 되거나 아악수보가 되어 의무적으로 3년을 근무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계속 음악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한 가지가 자발적 이직자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는 빠르게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있었고 몰락한 조선의 궁중음악인은 사회적으로 그리 환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도 결국 많은 이들이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이직을 했고 선생도 그 중 한분으로 상업 계통을 거쳐 면사무소 등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동안 생업에 종사하며 별도로 개인적인 가야금 수업을 하던 선생은 서울대 국악과 한만영 교수의 초청으로 국립국악원의 정악 가야금 사범직을 맡게 된다. 그리고 퇴직 후에는 현재까지 성조악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깊고 오묘한 소리를 잊지 못해

인터뷰 내내 낮고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시던 선생님은 현대의 국악 상황에 대해 언급하실 때는 조금 목소리를 높이셨다.

"아까도 말했지만 음악은 말이나 악보로 설명이 되지 않아요.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요즘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악보를 따라 하기만 할 뿐 예전에 선생님을 통해 들었던 소리와는 천지차이에요. 지금은 국악이라는 말로 아악이랑 산조, 판소리 이런 것들이 모두 같이 다뤄지고 대학에서도 가르쳐지지만 그러다 보니 너무 산만하게 되고 배우는 사람들도 성취를 이루기가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예전의 함화진 선생님의 가야금이나 대금을 부시던 김계선 선생님의 연주는…… 그건 뭐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 깊고 오묘한 음은, 그래서 그런 부분이 큰 유감이에요."

선생은 안타까움과 당시의 감동적인 기억들로 말을 중간 중간 잇지 못했다.

가야금을 연주중인 이창규 선생의 손
가야금을 연주중인 이창규 선생의 손심은식

덧붙이는 글 | 다음주에는 동은 이창규 선생님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주에는 동은 이창규 선생님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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