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순택씨의 시신이 북측 유가족에게 인도될 때만 해도 잠잠했었다. 보수언론조차도 시신 인도 사실을 건조하게 전하는 데 그쳤다. 눈을 감은 고인의 염원마저 가로막는 건 가혹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조·중·동과 <세계일보> 등 보수언론이 일제히 말문을 열고 나섰다. 국가정보원이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에게 '북한이 테러를 가하려 한다'는 첩보를 전달했다는 보도가 계기가 됐다.
<중앙일보>가 어제 전한 바에 따르면, '납북자 귀환활동을 벌여온 최 대표의 신변을 북한이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탈북자 등으로부터 입수한 국정원이 이 내용을 최 대표 본인에게 전달했고, 통일부는 경찰에 최 대표의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국군포로·납북자 귀환은 당연한 지적, 문제는...
조·중·동과 <세계일보>는 바로 이 점을 질타하고 나섰다.
"최 대표의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된 것만으로도 한이 맺힌 일인데 이제 아들인 그가 북의 테러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세계일보>)라고 반문하면서 정부를 향해 최 대표의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하라고 촉구했다. 당연한 지적이요, 주문이다.
또 <조선일보>는 북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며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을 돌려보낸다고 해서 북한의 비밀이 더 새나갈 것도 없고 북한 체제가 위협받을 까닭도 없다"고 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인정(人情)과 현실을 아우르며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귀환을 촉구하는 이들 신문의 주장에 토를 달 필요는 없다. 문제는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귀환을 어떻게 실현시킬까 하는 점이다.
지난 8월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가 회담이 결렬된 전례로 볼 때 쉬 풀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두고 '의거 월북'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서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기에 핵심적으로 짚어야 하는 문제는 북한의 변화를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아와 조선의 해법
바로 이 지점에서 판단이 갈리고 있다.
<동아일보>는 "인권의 범주를 넘어서는 문제"로서 "대한민국 국민과 자유민주체제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나서 정부가 1조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하고, 민간단체도 지난해 1411억 원을 지원한 사실을 환기시켰다. 여차하면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 약속을 철회해야 한다는 논지다.
반면 <조선일보>는 귀환 문제가 "체제를 떠나 인간 세상의 도리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그렇기에 <조선일보>는 북한을 향해 돈 문제를 꺼내들지는 않았다. 다만 "북한 정권에 사람의 도리를 일깨우기" 위한 프리덤 하우스의 북한인권 세미나가 12월에 서울서 열린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리하자면, '여차하면 해법'을 두고 <동아일보>는 '돈'을 제시했고, <조선일보>는 '인권'을 제기한 셈이다.
나름대로 숙고 끝에 내놓은 해법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다. 100억 달러의 거금을 놓고 오간 북일 수교 교섭이 납치일본인 송환문제로 중단된 전례, 그리고 유엔이 해마다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전례를 떠올려보면 '돈'이든 '인권'이든 '약발'이 쉬 먹힐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정부의 고민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돈'과 '인권'을 무기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가 오히려 북한 핵문제,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마저 뒤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 말이다.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문제를 거론하고, 납북적심자회담을 열어 재차 거론을 했는데도 반걸음의 진척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카드는 뭘까?
중앙의 순환 논리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안이하고 성의 없는 협상태도"를 질타하면 할수록 그 행위는 소모적인 정치공세로 치환된다. <중앙일보>의 사설 한 구절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원론적으로 장기수들의 북송은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0여년 이상 복역하고 나서도 북한에 돌아가겠다는 그들을 굳이 막을 명분과 실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정부는 인권보호를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똑같이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장기수 북송과 관련해 전·현 정부가 보여 온 안이하고 성의 없는 협상태도다. … 정부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절규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국방이 국민의 의무이듯 참전 자국민에 대한 생사확인과 송환은 정부의 기본 책무에 해당한다."
<중앙일보>의 논리는 순환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막무가내 논법이다. "정부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해봐라" 식이다. 제시한 해법은 없다. "그래도 성의를 보여라"는 주장뿐이다.
그 바로 뒷구절에서 통일부가 이번 주에 장기수 추가북송을 발표할 예정이고, 정부가 올해 북한에 지원한 액수가 1조원이란 점을 환기시킨 것으로 미뤄볼 때 이를 고리로 걸라는 뜻 같기도 하지만, 바로 앞서서 '감안'했던 사실, 즉 "(북한과) 똑같이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상황이 답답할수록 처방은 냉정해야 한다. 지금 따져야 할 점은 분명하다. 성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카드가 없는 것인지가 그것이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발을 떼고 있다. 이번 주 중에 북송을 원하는 장기수 28명의 추가 북송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앙일보>의 보도다.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햇볕 비추기' 카드 외에는 다른 카드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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