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와 조계종 중앙신도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동당 등의 주최로 지난 9월 25일 주최한 친일파재산환수특별법 제정 등반대회가 열렸다. 이날 등반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내원암 법당 앞에서 친일파 재산환수법 제정을 정치권에 촉구하고 있다.송영한
'친일파의 축재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재산환수에 대한 법률적 타당성 연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연구용역 의뢰로 지난 2004년 10월부터 두 달여 동안 작업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 제목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여러 박사님들과 함께 연구했지만 주요부분 중 하나였던 이완용 등의 재산형성 과정과 재산반환소송 사례분석을 담당했기에, 나는 줄곧 '재산환수법'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난 1~2월엔 한 달여간 국가기록보존소와 각 군청 지적과 등으로 지방출장을 다녔다. 현재 진행 중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조차 국민모금운동에 의존해야 계속할 수 있었던 민간연구소로서는 사치스러울 수도 있는 일제시대 토지조사부에 대한 지방조사 작업도 미약하나마 수행한 셈이다.
현지조사를 하면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당위인 친일청산을 위한 기초조사, 특히 국가가 일제시대 친일행위자의 재산현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려 시도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광복 60년만에야 '민간연구소'에서 일제시대 친일행위자의 재산현황 조사를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상투적인 언어로 '1949년 반민특위 와해'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역사적 책무에 대한 또 다른 회피라는 생각조차 든다.
친일파 후손 행태 '좌절감' 남겨... 과거 문제 아니다
이는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현재 진행 중인 친일행위자 후손들의 행태가 과거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자 미래를 가늠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친일행위자 후손들의 행태가 사람들의 가슴에 또 다시 좌절감(사회적 분노감이든 역사에 대한 배신감이든)을 남긴다는 점에서 분명히 오늘의 문제다.
따라서 재산환수법을 둘러싸고 '과거사'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즉 사회 일각에서 이를 과거사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의제설정이다.
지난해 연말 국회에 연구보고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이 과연 제정될 수 있을까"하는 회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올해 초 지방조사를 거쳐 지난 2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를 넘긴 169명 발의로 이 법안이 상정됐다는 사실은 입법 가능성이 현실화된 고무적인 변화였다.
본래 민족문제연구소는 국회보고서 말미에 "행정자치부에서 시행하는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이 창씨명을 포함한 일본인 명의토지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자칫 본래 취지와 달리 친일행위자의 재산찾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사업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무렵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실과 함께 '조상땅 찾아주기 사업' 시행실적에 대한 자료 및 사업시행 재검토를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자부 자료는 추석을 앞두고서야 받아볼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자료에 대한 분석결과가 지난달 21일 언론에 발표된 내용이다.
설명하자면 2004년 한해에만 166명의 친일인사(로 추정되는 인물의) 후손들이 110만여 평의 토지를 찾아간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중엔 송병준, 이근호, 민영휘의 후손들이 적게는 수백·수천평에서 많게는 10여만평 가량을 찾아간 것도 포함돼 있다.
다른 인물들을 살펴봐도 상황은 심각하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를 비롯한 경찰 고위간부 50여명의 후손들이 40여만평을 찾아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행자부 자료가 애초 한글 이름만 적혀 있어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일이 계속 된다면 한국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공화국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역사 부적응자?
행자부 자료를 분석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는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지난 100년을 돌이켜 볼 때 어느 시점부턴가 한국사회에서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역사 부적응자'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우리에게도 1900년대 초반 분명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이 있었다. 광복60주년을 맞아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왕산 허위 선생, 망명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한 안동의 김흥락 선생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그리고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시영·이회영 선생 집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시영 선생 집안은 국망(國亡) 직후 망명을 떠날 때 서울 주민들이 왕실의 피신으로 오해했을 정도로 부자였다 한다. 살림살이 규모와 이주행장의 장관이 왕실의 이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이 집안이 독립운동에 쏟아 부은 가산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원에 이른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매국행위를 한 집안은 3대가 흥한다'는 속설이 지배하게 됐다. 이는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 실태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다시 과거 역사 타령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친일 후손들의 재산 찾기를 과거사 문제로 좁히고 의제설정을 하려는 견해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제, 그것도 국가·사회적으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한 '친일행위자 후손의 재산찾기 문제'에 대한 합의된 해법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당초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친일파 재산환수법 성격과 관련, '광복 60년만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재산환수보다 역사청산의 상징'이라는 관점이 강했다. 그러나 '조상땅 찾아주기 사업' 내역 분석 및 일련의 기초조사를 거치면서 이 문제가 매우 시급한 사회적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다고 다시 평가하게 됐다. 무엇보다 일제시대 친일파의 보유재산 규모와 그 재산이 가지는 사회적 파장에 대한 재평가에서 비롯됐다.
현재 연구소에서 파악하고 있는 자료만 놓고 보더라도 옛 친일파 재산은 엄청나다. 논란의 주요대상이 되는 매국형 친일행위자(100여명)와 중추원 재직자(300여명) 중 일부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매국형 친일행위자 10여명의 일제 시대 보유토지는 1000만평 이상, 중추원 관계자 중 30여명은 5000만평 가량의 토지를 보유했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매국형 친일행위자와 중추원 재직자 전체를 조사한다면 친일행위자들이 일제시대 보유한 토지는 1억평(제주도 면적의 약 6분의 1)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이들이 소유했던 토지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자체가 친일파 후손의 재산 찾기 움직임의 근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