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주에 산채 비빔밥 어때요?

<음식사냥 맛사냥 47>아삭아삭 고소하게 감기는 깊은 맛 '산채비빔밥'

등록 2005.10.06 18:18수정 2005.10.0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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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특히 맛이 좋은 산채비빔밥
가을날 특히 맛이 좋은 산채비빔밥이종찬
제사 음식 혹은 피란음식으로 뿌리 내린 비빔밥

예로부터 가난한 민초들이 자주 먹었다는 비빔밥. 입맛이 없거나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커다란 대접에 찬밥 한 공기 통째 엎고, 남아있는 반찬을 밥 위에 올려 참기름 서너 방울, 고추장 한 숟갈과 함께 쓰윽 쓱 비비기만 하면 금세 맛깔스럽게 탈바꿈하는 비빔밥. 비빔밥의 뿌리는 제사를 지낸 뒤 여러 가지 나물을 제삿밥과 함께 비벼먹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800년대 말, 조선 후기 우리나라 전통음식의 조리법을 조목조목 엿볼 수 있는 책 <시의전서, 是議全書>(상.하 2편을 1권으로 묶은 책으로 지은이는 알 수 없다)에 따르면 비빔밥을 '부빔밥' (골동반)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즉, 부빔밥은 이미 지어놓은 찬밥에 여러 가지 나물로 만든 반찬을 넣고, 고추장에 골고루 부빈 밥"이라는 것이다.

한편, 비빔밥을 '피란음식'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끝없이 이어진 외침과 피란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몽골, 거란, 여진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그 당시 외적들은 어린이나 노약자 등을 보이는 대로 살육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민족은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멀리 피란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 민족이 피란을 가면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급히 가지고 나온 반찬과 찬밥을 바가지에 한꺼번에 쏟아 부어 쓱쓱 비벼서 가족들끼리 나눠먹었다는 것이다. 하긴, 피란을 가는 마당에 반찬 따로 밥 따로 챙겨먹을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해인사 주차장 곁에 있는 감로식당에는 '불'이란 글씨가 박힌 도자기가 즐비하다
해인사 주차장 곁에 있는 감로식당에는 '불'이란 글씨가 박힌 도자기가 즐비하다이종찬

동동주 한 잔 먹고, 말린 취나물 한 입 먹고
동동주 한 잔 먹고, 말린 취나물 한 입 먹고이종찬
산채비빔밥은 단풍이 불타는 산사의 계곡에서 먹어야 제맛

비빔밥의 종류도 참 많다. 산나물을 넣고 쓰윽 쓱 비벼먹는 산채비빔밥에서부터 보글보글 끓는 청국장이나 된장을 넣고 고추장에 비벼먹는 된장비빔밥과 돌솥밥에 쇠고기, 도라지, 고사리, 호박 등을 넣고 비벼먹는 돌솥비빔밥을 비롯해 열무비빔밥, 불고기비빔밥, 콩나물비빔밥, 무채비빔밥, 낙지비빔밥 등, 비비는 재료에 따라 그 이름도 달라진다.


그 중 산에서 나는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참기름 서너 방울 떨어뜨려 고추장에 비벼먹는 산채비빔밥은 그 맛도 그만이지만 영양가도 끝내준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각종 양념에 버무려 밥과 함께 비벼 먹는 산나물은 식이섬유와 비타민 등 사람 몸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가 듬뿍 들어 있어 말 그대로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산채비빔밥에 들어가는 산나물은 자연 그대로의 것을 날로 먹기 때문에 영양소가 하나도 파괴되지 않는다. 또 산나물마다 지니고 있는 독특한 약효성분이 있어 피로회복과 혈액순환은 물론 피부미용과 각종 암 등 성인병 예방에도 그만이며,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여성들의 다이어트에도 아주 좋다.


특히 가을철 산에서 나는 나물은 나물이 아니라 약초다. 봄산에서 나는 나물이 부드럽고 연한 향기 속에 약간 쌉쓰럼한 맛이 있다고 한다면, 가을산에서 나는 나물은 약간 억세지만 향기가 몹시 진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그 때문에 산채비빔밥은 봄보다는 가을, 도심의 식당에서보다는 단풍이 불타는 산사의 계곡 주변에서 먹는 것이 분위기도 있고 맛도 좋다.

감로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시키면 따라나오는 반찬들
감로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시키면 따라나오는 반찬들이종찬

머구대 조림이 특히 아삭아삭 씹히는 게 감칠맛이 난다
머구대 조림이 특히 아삭아삭 씹히는 게 감칠맛이 난다이종찬
산채 비빔밥 자주 먹으면 세월이 거꾸로 흘러간다

"산채는 말 그대로 산에서 나는 여러 가지 나물을 말하지예. 저희 집 산채는 이곳 가야산에서 약초를 캐는 산꾼들이 뜯어낸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산채가 모자랄 때면 가까운 산청 등지에서 가져오기도 해예. 그리고 표고버섯은 영동에서 재배하는 곳에서 가져와예. 이곳은 추운 곳이라 표고버섯은 나지 않고 송이버섯이 많이 나거든예."

지난 달 13일(화) 오후 1시. 나의 합천 길라잡이 서익수(53) 선생과 함께 막 단풍빛을 띤 계곡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홍류계곡을 거슬러 올라 합천 해인사로 가다가 우연찮게 들른 산채비빔밥 전문점 '감로식당'(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임리). 이 집 주인 김준형(52)씨는 "이곳에서 산채정식과 산채비빔밥을 만든 지가 올해로 18년째"라고 말한다.

김준형씨는 "단풍이 물드는 가을날, 산사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 물을 바라보며 동동주 한 잔 곁들여 먹는 산채비빔밥은 신선들이 먹는 음식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라며 "산채비빔밥을 자주 먹으면 잔주름이 사라지면서 점점 젊어지기 때문에 세월이 거꾸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오십대 중반으로 치닫는 김씨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언뜻 바라보면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로 보인다. 주방을 맡고 있는 김씨의 아내 얼굴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도 고기를 싫어하고 채소를 좋아한다는 김씨 아내의 곱상한 얼굴, 우윳빛으로 보얗게 피어난 매끄러운 얼굴에서는 부처님의 후광처럼 환한 빛이 감돈다.

감로식당 창밖에는 맑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감로식당 창밖에는 맑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이종찬

'불'이란 글씨가 박힌 저 항아리에 물을 담아 먹으면 감로가 될까
'불'이란 글씨가 박힌 저 항아리에 물을 담아 먹으면 감로가 될까이종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읊으며 흘러내리는 계곡물

"산채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날 것으로 먹기 때문에 식이 섬유가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채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영효와 영양소를 몽땅 다 섭취할 수 있지예. 요즈음 사람들이 웰빙, 웰빙하는 것도 사람 손이 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을 먹어야 몸에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라는 기(그러는 게) 아이겠습니꺼."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감로를 먹는다 하여 이름 붙인 감로식당. 식당 안 100여 평 남짓한 널찍한 공간 곳곳에는 평일 오후인데도 산채비빔밥(6천원)을 비벼 볼우물이 볼록하도록 떠먹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표고버섯볶음(2만5천원)과 표고찌개(2만5천원)를 안주 삼아 노르스럼한 동동주를 감로수처럼 꿀꺽꿀꺽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김씨에게 동동주 한 통과 산채비빔밥을 시키자 "요즈음 표고버섯도 한창 제맛이 들었는데"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내가 "우선 요기부터 한 뒤 나중에 표고버섯볶음 맛을 보도록 하지요"라고 말하자 김씨가 고개를 까딱하더니, "산채비빔밥이 나올 때 표고버섯볶음을 덤으로 조금 드릴 테니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시키지 않아도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씨가 주방으로 사라진 뒤 한동안 식당 창벽 아래 줄줄이 놓여 있는 도자기를 바라본다. '佛(불)'이라고 새긴 도자기에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한문으로 빼곡히 적혀 있다. 식당 창밖에 늘어진 오래 묵은 붉은 소나무와 떡갈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풍경도 아름답다. 그 풍경 아래에는 티없이 맑게 흐르는 계곡물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읊고 있는 것만 같다.

오색으로 가지런하게 놓인 산나물들
오색으로 가지런하게 놓인 산나물들이종찬

잘 비벼진 산채비빕밥
잘 비벼진 산채비빕밥이종찬
이윽고 달착지근한 누룩 내음이 훅 풍기는 동동주와 표고버섯이 들어간 된장찌개, 취나물, 깍두기, 배추김치, 땅콩조림, 멸치젓갈, 머구대조림 등이 차례대로 식탁 위에 오른다. 이어 산채나물이 가득 든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과 하얀 쌀밥 한 공기가 놓인다. 빠알간 고추장과 함께 오색으로 담겨있는 산나물이 첫 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갈색 고사리와 말린 취나물, 붉은 당근과 빠알간 고추장, 거무스레한 표고, 하얀 도라지, 연초록 머구대와 오이, 열무김치, 노오란 콩나물, 하얀 통깨가 가지런하게 담겨 있는 스테인리스. 그 그릇에 쌀밥 한 공기를 그대로 엎는다. 그리고 된장찌개 국물을 서너 수저 넣어 비빈 뒤 한 수저 입에 떠 넣자 향긋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 속을 가득 채운다.

산채비빔밥이 혀 끝에 살살 녹아내리는 그 감칠맛. 아삭아삭 씹히면서도 혀끝에 고소하게 감기는 그 깊은 맛. 몇 번 씹을 틈도 없이 그대로 꾸울꺽 삼켜진다. 그래. 이 기막힌 맛 앞에 시원한 동동주 한 잔 없으면 되겠는가. 산채 비빔밥을 몇 수저 떠먹은 뒤 내 얼굴이 비치는 동동주 한 잔 쭈욱 들이키고 나자 신선이 부럽지 않다.

동동주 한 잔 먹고 산채비빔밥 한 수저 뜨고. 동동주 한 잔 먹고 벗의 얼굴 한 번 쳐다보며 웃고. 동동주 한 잔 먹으며 식당 창밖에 놓인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잠기고. 동동주 한 잔 먹으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읊으며 흐르고 있는 계곡물 소리에 취하고. 동동주 한 잔 먹으며 계곡에 선 나무들도 단풍이 들고, 벗도 단풍이 들고, 나도 단풍이 들고.

산채비빕밥을 자주 먹으면 세월이 거꾸로 흐른다고 한다
산채비빕밥을 자주 먹으면 세월이 거꾸로 흐른다고 한다이종찬
"감로수를 홀짝홀짝 드시더니 벌써 신선이 다 되셨네예. 이 표고버섯볶음을 드시면 신선의 경지를 벗어나 아예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갈 수도 있지예. 그라고 혹 잠이 오시면 그 자리에 드러누워 한숨 주무시고 가셔도 좋아예. 감로식당에서 부처님이 주무시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이겠습니꺼."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경부고속도로-대구-금호 나들목-88올림픽 고속도로-해인사 나들목-997번 지방도 10km-해인사 주차장-감로식당(055-932-7330)

덧붙이는 글 ☞가는 길/서울-경부고속도로-대구-금호 나들목-88올림픽 고속도로-해인사 나들목-997번 지방도 10km-해인사 주차장-감로식당(055-932-7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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