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83회

등록 2005.10.13 09:05수정 2005.10.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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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눈길을 의식한 서승명이 슬그머니 여자의 둔부에서 손을 떼고는 아직 피지 않아 수줍은 듯 봉오리를 맺고 있는 붉은 앵화(櫻花) 가지를 뽑아 들고는 동생인 듯한 소녀의 가슴 깃에 꽂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소녀는 여전히 콧소리를 섞어 애교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은 앳되어 보이지만 몸은 이미 다 자란 것도 같았다.

"하핫… 한결 보기 좋구나…."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흡족한 웃음을 흘린 서승명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오늘 팔아야 할 이 꽃은 모두 얼마이더냐?"

그의 손은 어느새 다시 여자의 둔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쯤이면 서승명의 수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챘을 것이었다. 꽃바구니의 꽃을 모두 사준다는 의미도 노골적인 말이었다. 헌데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 분 나으리가 공평하게 사주신다면 몰라도 나으리께서는 이 꽃 전부를 혼자서 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설마 이 어른이 그깟 꽃값 정도 줄 돈이 없을 것 같아 그러느냐?"


서승명은 이 계집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사의 기본은 경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돈을 내는 것 보다는 여러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서승명은 이 계집이 돈을 되도록 많이 뜯어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호호…."

그녀는 가늘고 흰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자신의 둔부를 더듬고 있는 서승명의 손을 슬쩍 밀어내려는 듯 보였다. 돈을 많이 뜯어내려 애를 태우겠다는 수작인가? 서승명은 그녀의 속셈을 알겠다는 듯 더욱 집요하게 손을 뻗어 둔부 아래로 타고 내려갔다.

"허헉---!"

하지만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던 그의 손길은 한 순간 나직한 신음과 함께 경련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겨드랑이에 화끈한 통증이 밀려들었고,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아득해지는 그의 귀로 계집의 짤랑거리는 교소가 들렸다.

"호호… 꽃값은 돈이 아니에요. 바로 당신들의 목숨이죠."

목소리는 나중에 들렸지만 이미 동생으로 보이던 소녀가 진붕의 가슴팍을 향해 손바닥 길이의 비수를 세 개 날리고, 앞을 못보고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던 노파가 단세적의 등짝에 장력을 날린 것은 서승명의 겨드랑이에 날이 톱니처럼 생긴 기형의 비수가 박힌 것과 거의 동시였다.

"헛…!"
"저… 저런…!"

주위에서 급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층에 앉아 식사를 하던 인물들 중 거의 절반이 화령문과 천궁문의 제자들이었다. 하지만 경악을 토하는 것과는 달리 너무나 급작스런 사태에 그들은 오히려 움직일 생각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슈우우--- 퍼--펑---!

소녀가 던진 세 개의 비수 중 한 개가 진붕의 어깨에 박히고, 노파의 장력이 단세적의 등판에 작렬하며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바로 옆에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서있던 노파가 그리도 쾌속하게 장력을 날릴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하면 당하게 마련이다.

"우욱--!"

단세적과 진붕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와장창----!

그 신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세 여자는 창문을 뚫으며 어느새 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일순간에 끝난 일이어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황급히 주위의 인물들이 움직였지만 이미 모든 일은 끝난 뒤였다. 쓰러진 서승명과 엎어진 단세적을 일으키는 정도.

서승명은 절명해 있었다. 겨드랑이를 파고 든 비수는 그의 심장과 폐를 가로질러 관통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 다행인 것은 진붕이 그 짧은 순간에 몸을 틀었기 때문에 어깨에 비수가 박히는 정도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단세적은 의식을 잃고 있지는 않았지만 큰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의 입에서는 꾸역꾸역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인장(白刃掌)!"

단세적의 상세를 살펴보던 한 중년인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옷이 대충 벗겨진 단세적의 등짝에는 하얀 장인(掌印)과 함께 칼로 난도질한 듯한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백인장은 백련교의 독문무공이다.

"결국 백련교… 이 자들이 천마곡 행을 막으려고 이 짓을…."

중인들의 얼굴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이 사태가 백련교도의 짓임이 밝혀진 이상 결론은 역시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아마 미리 알고 있었다면 꽃을 들고 찾아 온 세 여인을 유심히 살폈을 것이고 이리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르는 것이 당연했을지 모른다. 화북의 살수집단인 사영천에 삼색화(三色花)라 불리는 특이한 여살수 세 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무림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세 가지 색깔의 꽃은 바로 그녀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산서성 임분(臨汾)의 한적한 다점에서도 큰 소동이 있었다. 객점을 겸하는 다점이었는데 엄청난 폭발로 인하여 다점은 물론 인근이 모두 초토화된 것이다. 산불까지 번져 주위는 온통 매캐한 연기와 함께 불에 탄 흔적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그 다점에 뇌정보(雷霆堡)의 인물들이 묵었다는 점이었다. 뇌정보는 화기(火器)로 유명한 무림 문파였고, 그곳에서 제조된 화약이나 화탄은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뇌정보의 서른두 명의 인물 중 그 무서운 폭발 속에서 살아 난 인물은 뇌정보의 보주 및 일대 제자 네 명뿐이었지만, 그들 역시 성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중원 곳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 기습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천마곡으로 향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사천 당가의 독혈군자(毒血君子) 당일기(唐逸奇)의 일행마저도 기습을 당했고, 현 당문의 문주인 당일천(唐逸天)의 둘째 아들인 당건(唐健)이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목적은 분명했다. 천마곡을 향하는 무림인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짓일 것이란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본 인물들은 기습을 하는 자들의 의도를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기습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당한 인물이나 문파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토목지학이나 기관지학, 화기, 독 등 무공이 아니라 대규모 혈투에서 변수가 될만한 인물이나 문파만을 기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인물들은 방백린이 건네 준 전월헌의 살생부에 기재되어 있는 인물이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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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곡주의 의도를 솔직하게 말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소?"

기이하게도 말을 한 인물의 얼굴은 붉다 못해 자색을 띠고 있었고, 굵은 머리칼 역시 적발(赤髮)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완강하게 보이는 굵은 목선이 범상치 않은 위엄과 더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첫눈에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이었다.

바지만 입은 채 홍포(紅袍)를 걸쳐서인지 가슴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살결 역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의도…? 이미 대군(大君)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천마곡의 곡주이자 열명의 사형제 중 첫째인 장철궁(張徹躬)은 적발의 중년인과는 달리 사소한 일이라는 듯 말을 넘겼다. 그의 퉁방울만한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릴 때는 언제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어리석다고 믿게 만든다. 우둔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못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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