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84회

등록 2005.10.14 08:50수정 2005.10.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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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미 우리의 턱밑으로 다가들고 있소. 곡주는 정말 단순한 것이오?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이오?"

"대군은 지금 다른 좋은 계책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장철궁은 여전히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매우 우둔해 보였다. 적발의 중년인은 양 태양혈로 쭉 뻗은 검미를 꿈틀거리며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곡주는 지금 우리 모두를 죽이자는 심산이오?"

너무 노골적인 말이었다. 이미 작정을 하고 온 듯 대군이라 불리는 적발의 중년인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 역시 수백 명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다.

장철궁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버릇처럼 뒤룩거리던 눈동자의 움직임도 멈추고 대군을 직시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우둔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를 압도하는 듯한 일대종사의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졌다.

"내가 누군가?"


위압적인 장철궁의 말투에 다소 긴장은 되었지만, 대군 역시 위축되지 않고 전신에서 완강한 기세를 내뿜었다. 실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서로 엉키자 공기의 흐름도 멈추는 듯하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군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천마곡의 곡주요."

"인정하고 있으니 다행이군."


장철궁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본 곡주에게 자네를 포함한 곡 내의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이 있음은 인정하고 있는가?"

이것이 대군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무림인에게 있어서, 아니 어떤 조직이라도 수장(首長)의 명령에 따라야 함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 이러한 위계질서마저 인정치 않는다면 그 조직은 유지될 수가 없다. 대군 역시 한 조직의 수장이었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이었다. 대군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인정하오."

장철궁이 계속 추궁해 들어갔다.

"지금 자네가 보이는 태도가 본 곡주를 업신여기는 짓이란 사실도 인정하는가?"

대군의 눈에 미세하게나마 당황스런 기색이 흘렀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곡주에게 대든다는 것은 일종의 항명이다. 항명하는 수하를 참수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곡주의 권한이다.

"그건 아니오. 많은 생명이 달려있는 중대사에 의견을 내놓는 것이오."

"자네는 본 곡주의 결정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지 대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니야. 대안 없는 비난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정은 곡주 혼자서 했소. 곡주의 사형제들 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아시오?"

"아직 자네는 대안을 내놓지 않고 비난만 하고 있군."

"굳이 전 무림인을 본 곡으로 불러들였어야만 했느냐는 것이오. 그들은 빠르면 열흘 이내, 늦어도 보름 이내에 본 곡으로 들어올 것이오. 본 곡에서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많은 제자들이 죽을 것이오."

"본 곡주는 아직까지 자네가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듣고 싶네."

"나는 곡주가 한 문파씩 처리하지 않고 그들과 정면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그것이 궁금하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오. 주력을 파견한 문파는 비어 있소. 본 곡의 입구를 최소한의 인원으로 막으며 시간을 끌게 되면 순식간에 여러 곳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소."

장철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이미 서로의 속내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서로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추궁할 수는 없다. 어차피 속이고 속는 것이다.

"그것이 자네의 대안인가?"

"그렇소."

"그러면 한 가지만 묻지."

"…!"

"자네들에게 과거의 절대구마와 같은 무위가 있다고 자신하는가?"

"모자라오."

"그것이 본 곡주가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다. 이 산서성에 있는 문파만 정리하는데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린다. 하북과 하남, 산동과 섬서성을 접수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일년이 넘게 걸리지 않겠나? 그 동안 그들은 손놓고 우리가 기습하기만을 기다릴까?"

"…!"

"과거 절대구마가 휩쓸었을 때의 중원이 아니다. 절대구마가 환생한다 해도 과거와 같이 휩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대답하기 어려웠다. 사실이 그러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듯 전 무림은 구마겁 이후에 놀라울 정도로 변모했다.

"자네 말대로 우리에게 모든 문파를 접수할 힘이 있다 하더라도 천동(天洞)과 귀곡(鬼谷)은 어찌할 텐가?"

이어지는 장철궁의 말에 대군은 할 말을 잊었다. 중원 무림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모습을 보이는 천동과 귀곡의 존재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천동과 귀곡은 눈에 보이는 문파가 아니었다. 분명 존재하되 터 잡은 바도 없고, 나타나되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문파.

하지만 신산지묘(神算之妙)의 계책과 천상의 비술(秘術)과도 같은 무학이 있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절대구마가 쓰러진 것이 천동의 오룡(五龍)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그 오룡의 무학이 기재된 오룡번으로 인하여 무림에는 수십 차례에 걸쳐 큰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대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장철궁은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는 책망하듯이 말을 이었다.

"본 곡의 지형은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지. 중원 무림의 주력을 이곳에서 격파하고 나면 그들은 껍데기일 뿐이야. 그 뒤에 본 곡에 반대하는 문파 몇 군데만 정리하면 중원은 우리 손에 들어온다."

"…!"

장철궁의 본래 의도를 의심하는 대군은 불만스런 기색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군 역시 전월헌이 곧 있을 천마곡의 혈전에서 변수가 될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철궁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본 곡주의 생각에 불만이 있다면 자네의 마지막 기회를 사용해도 좋다."

그 말에 갑자기 대군의 전신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탁자 아래의 꽉 쥔 주먹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어쩌면 장철궁의 말은 자신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었다. 장철궁 자신을 꺾을 자신이 없다면 무조건 따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철궁에게 두 번 패했다. 그것으로 인해 그와 그들의 형제는 장철궁의 명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승부에 대한 약속이었다. 첫 번 대결에서 패한 후 장철궁은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두 번의 기회를 주겠다고. 자신을 꺾으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처음 패한 후 일년 뒤에 도전한 그 두 번째 대결에서도 그는 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한 번의 기회였다.

장철궁은 대군에게 도전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대군의 눈에 핏발이 서며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아직은 아니었다. 십년 전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다. 참는다는 것은 어렵지만 참고 난 뒤에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그 기회를 사용한다면 무림인들이 본 곡에 들어오기 전이면 좋겠군."

모욕감을 느끼고 장철궁의 거처를 빠져 나가는 대군의 귀로 파고 든 장철궁의 말은 대군에게는 한이 맺힐 말이었다. 대군을 자극해 반심을 가진 그를 먼저 처리하고 싶다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제 7 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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