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총총한 별의 향연을 찾아서

[여행] 10월에 떠나는 3박 3일 지리산 종주기

등록 2005.10.15 09:09수정 2005.10.1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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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꼭 한번" 해보고픈 일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힘을 준다. 누구에게나,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졸업하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출산하기 전에, 또는 죽기 전에 등등, 언젠가 한번은 해보리라 하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괜스레 '주춤'하고 망설이게 되는.

내게 지리산 종주는 그런 일이었다. 산을 잘 타지도, 그렇다고 한없이 처지지도 않는, 약한 근력과 믿을 만한 지구력을 갖고 있는 나에게 지리산 종주는, 그야말로 아련한 꿈이었다. 한번쯤 꼭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저지를 기회를 늘 엿보지만, 막상 기회가 온다고 해서 성큼 잡아챌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던 일.


그러다 이번 가을, 우연히 여행을 하게 될 일이 생겼다. 여행을 제안한 이가 먼저 지리산 종주를 조심스레 내놓았고 나는 "지리산, 좋지!"하고 내뱉는 순간부터 두려움, 무거움, 귀찮음, 걱정 등등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종주는 처음이었다. 등산은 언제나 숨이 턱까지 차면서 한참을 올라갔다가 다시 한없이 내려오기만 했던 일. 주능선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종주가 어느 만큼의 체력을 요구할지, 3일 동안 꼬박 산에 있어야 하는데 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종주를 떠나게 된 건 순전히 "좋다"고 승낙해 버린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정 힘들면 중간에 만나는 하산길로 내려오는 것으로 유연하게 일정을 잡고 일단 떠나기로 했다. 일행은 3명, 모두 30대 초반, 지리산 종주가 처음인 여자 둘, 어렸을 때 종주 경험이 한 번 있는 남자 하나.

10월 3일 밤 10시 50분,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구례역으로 갔다. 역에 내린 것이 새벽 3시 22분. 비가 추적추적 내려, 산에 오르기도 전에 추위를 만났다. 산에서 입으려던 옷, 하산한 뒤 서울로 돌아올 때 갈아입으려던 옷 등등을 다 꺼내서 모두 껴입고 용산역에서 장을 봐온 물건들을 나눈 뒤 짐을 다시 꾸렸다. 같은 기차에서 내린 등산객 3명이 콜밴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하여, 구례버스터미널까지만 싼 값에 동승할 수 있었다. 4시 20분, 구례에서 성삼재 가는 첫 버스가 출발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길이다. 어두운 데다가 비가 계속 내려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 탓에, 머리에 랜턴을 썼는데도 자꾸 나뭇가지에 걸리며 길 아닌 곳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등산로는 잘 만들어 놓았지만, 만만한 경사는 아니다. 앞서 가던 등산객이 중간에 길을 못 찾고 서 있는 불빛을 보고는 대피소에 다 온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1시간가량이 걸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자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대피소 입구의 온도계는 4.7도, 이날 최저기온이 4도 이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대피소에서 1시간쯤 쉬고, 터미널에서 사온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하는데 비가 슬슬 그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멀리까지 시야가 트였다. 비온 다음이라 운해가 더욱 짙다.

a 2005.10.4 8시 19분, 지리산 운해

2005.10.4 8시 19분, 지리산 운해 ⓒ 김정혜


첫날은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벽소령 대피소까지 갈 것이다. 성삼재부터 시작하면 16.8km. 좀 길다 싶기는 하지만 둘째 날 수월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첫날 최대한 많이 움직이기로 했다.


몸은 무거운데,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르막도 있지만, 내리막도 있다. 쉬운 길이 이어지다가 바윗길이 나오다가, 또 계단이 놓여져 있다가 하는, 다양한 길이 적절히 섞여 있는 등산로다. 등산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숲길을 지나다보면 어느새 저 멀리 운해를 안은 산봉우리들이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마치 구름 위를 가듯, 봉우리를 나란히 하며 걷는다. 주르륵 올라갔다가 주르륵 내려가는 어떤 등산에서도 만나기 힘든 풍경이다. 바윗길을 오르느라 고생을 하다가도 소설 <태백산맥> 표지 그림처럼 생긴 산자락들이 옆에 나타나면 몸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a 2005.10.4 지리산. 처음에는 계단이 반갑지만, 조금 지나면 계단이 가장 무섭다.

2005.10.4 지리산. 처음에는 계단이 반갑지만, 조금 지나면 계단이 가장 무섭다. ⓒ 김정혜


이 때만 해도 서울은 서늘한 바람이 그리웠는데, 지리산은 벌써 단풍이 시작되었다. 다리쉼을 하느라고 잠시 멈추면 이내 스산해진다. 쉴 때는 옷을 걸치고 있다가 출발하고는 다시 벗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땀이 흐르지 않아 여름보다 한결 수월하다.


a 2005.10.4 지리산. 단풍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주쯤에는 울긋불긋한 물결이 가득할 것이다.

2005.10.4 지리산. 단풍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주쯤에는 울긋불긋한 물결이 가득할 것이다. ⓒ 김정혜


연하천 대피소에 거의 다다르는 길은 상당히 힘든 구간이었다. 연하천 대피소는 작은 편에 속하는데, 바로 앞에서 식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큰 장점이다. 종주를 할 때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해 먹고 벽소령으로 가는 경우도 많지만, 조금 늦게 출발했을 때는 이곳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장터목까지 가기도 한다. 마치 산속 마을에 들어온 듯, 지리산에 폭 안겨 있는 지형이다.

점심을 먹고 벽소령으로 향한다. 몇몇 봉우리들을 만났는데, 설마 옆으로 지나가겠지, 싶었던 봉우리들을 그대로 넘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암석 두 개가 나란한 형제봉도 넘어간다.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5시 30분. 점심식사 전까지만 해도 계획했던 구간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벌써 종주 코스의 절반은 온 셈이다. 감격스럽다. 벽소령 대피소는 노고단보다도 큰 규모다. 남녀 숙소가 따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 2층이다. 모포는 1000원에 대여하고, 침낭은 없다. 불편한 것은 식수. 한참을 내려가야 수도꼭지로 물을 받을 수 있다. 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다가 두 번 내려갈 엄두가 안 나서 식수만 겨우 받고는 말았다. 세수는 물수건으로 대충 해결하고 다음 날 만나는 샘을 기약하기로 했다. 숙소 배정을 받고 밖으로 나왔는데 노을이 짙다.

a 2005.10.4 18시 28분. 벽소령 대피소, 노을.

2005.10.4 18시 28분. 벽소령 대피소, 노을. ⓒ 김정혜


둘째 날.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여유 있게 출발한다. 벽소령에서 장터목까지는 9.7km. 벽소령에서 출발하는 길은 아주 쉬운 길이다. 500m마다 서 있는 위치표시판이 금세 나타난다. 얼마 가지 않아 선비샘에서 다리쉼을 하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첫날은 내내 등산로 주변에 있는 샘을 지나쳤는데, 선비샘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수량도 풍부하다. 식수를 가득 채우고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하면서 여유를 부린다. 이때쯤부터 만나던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게 되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연하봉 가는 길 어딘가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평지였다.

a 2005.10.5 지리산

2005.10.5 지리산 ⓒ 김정혜


한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면 사방이 산봉우리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이미 울긋불긋한 기운이 아름답다. 등산객들은 서로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키며 이름을 말해 주고들 있다. 저 아래 흰 줄기가 남강이라고도 하고, 무등산이 보인다고도 한다. 바다가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겹겹이 끝없는 산들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 가라앉은 운해와, 산을 휘감고 도는 강, 산과 산 사이에 조그맣게 모여 있는 마을들. 우리가 출발한 노고단은 벌써 한참 먼 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고, 올라야 할 천왕봉 역시 저 멀리 있어 아득하다.

네 시간 정도를 걸어 세석평전에 다다랐다. 저 위에서부터 눈썰매라도 타고 미끄러지면 좋을 것 같은 지형이다. 봄엔 온통 철쭉으로 붉을 것이다. 철쭉 사이사이에는 구상나무가 푸르다. 봄에 다시 한번 와야지, 싶다. 세석 대피소에서 점심을 해 먹고 장터목으로 향했다.

a 2005.10.5 세석평전

2005.10.5 세석평전 ⓒ 김정혜


장터목 대피소는 한창 공사 중이다. 이곳도 남녀 숙소가 분리되어 있는데, 일단 2층으로 올라가서 여자 숙소는 다시 한 층을 내려가야 한다. 발이 붓기 시작해서, 계단은 물론이고 등산화를 신고 벗는 것도 슬슬 불편해진다. 공사를 하는 바람에 한참 아래에 있는 식수대 대신 가까운 곳에 임시 식수대가 마련되었다. 식수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산장에서는 축복이다.

어둠이 내리자 도시에 불빛이 들어온다. 깊은 산중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이 괜스레 어색하다. 이런 불빛은 도심에 있는 산에서나 보여야 할 것 같다.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 도시는 진주라고 하고, 한켠으로는 절 주변 등산로인 듯, 길 따라 알록달록한 빛도 들어온다. 해질녘 노을은 전날만큼 붉지는 않지만 넓게 퍼진다. 오후에 구름이 끼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날씨는 그야말로 시시각각 변한다. 내일은 일출을 보러 천왕봉에 오를 것이다. 과연 해가 떠 줄까.

셋째 날. 대피소에서는 6시 10분에 해가 뜬다면서, 1시간 10분 전에는 출발하라고 한다. 4시 30분, 평소라면 한참 뭔가를 하다가 잠들었을 시각에 일어나서 옷을 다 껴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나마 배낭을 대피소에 두고 오를 수 있어서 몸은 훨씬 가뿐한데, 물통을 들고 가기가 불편해 카메라와 랜턴만 챙겼다가, 내려올 때까지 목이 타서 혼이 났다. 주변은 암흑인데, 천왕봉에 오르는 등산객들의 랜턴만 일렬로 반짝인다.

제석봉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까만 하늘에 선명하게 박힌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피소 소등 시간이 9시경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정리하고 잠들기에 바빠 별을 본 것은 처음이다.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별자리들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별과 별 사이에 은하수가 하나씩 흐르는 듯한 광경이다. 별들은 머리 위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고 등 뒤에서 눈앞까지 펼쳐져 있다. 가장 익숙한 별자리인 북두칠성을 한참동안 고개를 젖히고 찾다가 앞을 바라보니, 눈앞에 북두칠성이 아주 크게 늘어서 있었다. 북두칠성의 꼬리부분 별이 눈높이에 있다.

a 2005.10.6 6시 정각. 지리산

2005.10.6 6시 정각. 지리산 ⓒ 김정혜


제석봉을 지나자 길은 많이 수월해진 편이다. 천왕봉이 가까이 보일 무렵, 랜턴 건전지가 다 떨어졌다. 슬슬 주변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다행히 랜턴 없이도 움직일 만하다.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다다르니 이미 정상에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이들의 불빛도 일렬로 보인다.

a 2005.10.6 6시 7분,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2005.10.6 6시 7분,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 김정혜


해가 뜰 것 같은 방향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것도 같은데, 하늘은 파랗다. 해 뜨는 시각이 6시 10분이라고도 하고, 20분이라고도 해서, 해가 이미 떠버린 것인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던 와중에, 해가 떠오를 위치에서 금빛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바심치는 사람들, "나온다, 나온다"하며 소리치는 이들. 어느 순간 강렬한 태양이 스르르 솟아나오고 함성이 뒤따른다. 바다에서 보는 일출과는 달리 처음부터 황금빛으로 빛나,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렵다. 이어 반대편의 반야봉에 햇빛이 닿으며 따스한 풍경을 만든다.

a 2005.10.6 6시 30분, 지리산 천왕봉 일출

2005.10.6 6시 30분, 지리산 천왕봉 일출 ⓒ 김정혜


한참을 기다려 '천왕봉'이라 쓰인 표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올라왔나 싶을 만큼 가파른 구간이 군데군데 있다. 장터목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중산리 계곡으로 하산하는데, 무릎에 무리가 갔는지 2시간 30분이면 된다는 하산길이 4시간이나 걸렸다. 주능선에서 바라보던 수묵화 같은 산줄기와 운해가 아직도 옆에 있는 것만 같다.

a 2005.10.6 7시 36분.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

2005.10.6 7시 36분.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 ⓒ 김정혜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종주 식단에 대한 짧은 조언

* 미숫가루 : 산행 도중 배고플 때나 아침에 입맛이 없을 때 간단하게 먹기에 유용하다.
* 죽 : 라면을 먹는 것보다 죽이 훨씬 낫다. 라면 대신 즉석식품으로 나오는 죽을 준비해 가거나, 쌀 또는 즉석밥에 물을 많이 붓고 죽을 만들어 따뜻하게 먹어도 좋다.

덧붙이는 글 지리산 종주 식단에 대한 짧은 조언

* 미숫가루 : 산행 도중 배고플 때나 아침에 입맛이 없을 때 간단하게 먹기에 유용하다.
* 죽 : 라면을 먹는 것보다 죽이 훨씬 낫다. 라면 대신 즉석식품으로 나오는 죽을 준비해 가거나, 쌀 또는 즉석밥에 물을 많이 붓고 죽을 만들어 따뜻하게 먹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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