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또 가도 정겨운 시골집에서의 하루

등록 2005.10.17 20:45수정 2005.10.1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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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부스스 눈을 뜹니다. 여섯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자고 성화입니다. 시골은 춥다며, 좀 있다가 해님이 나오면 나가자고 했지만 막무가내입니다. 세린이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 태민이도 덩달아 그 작은 손으로 저를 마구 때립니다. 일어나기 귀찮아서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결국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추울까봐 점퍼까지 입히고 신발을 신겨 놓자 손 안에 잡혀 있던 참새가 이 때다 하면서 날아가듯 뽀르르 아빠 품을 밀치고는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누나가 나가자 급해진 태민이를 가까스로 달래면서 옷을 입히고는 마당에 내려놓습니다. 역시 뽀르르 누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갑니다.

아이들 내보내고 더 잘까 했지만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허전한 생각도 들어 아이들 뒤를 따라 눈곱을 떼면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갑니다. 몸이 저절로 으스스 떨립니다. 아이들은 벌써 흙장난에 푹 빠졌습니다. 제가 가까이 가자 세린이가 "아빠는 잠꾸러기야!"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잠꾸러기입니다. 아내도 세린이처럼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잠꾸러기 아빠를 예뻐하는 사람이 있으니, 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제가 한참 젖을 먹던 아가일 때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을 낮삼아 일을 하셨다 했습니다. 일할 때 어머니는 저를 바구니에 담아 논둑에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말뚝 사다리에 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뱀이 물까봐 그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한참을 정신없이 일 하시다 하늘에 떠있는 해를 보고는 깜짝 놀라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젖을 줄 시간이 훨씬 지났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제가 아무 소리도 없으니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부분 잠을 자거나, 혹은 깨어 있어도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구니에서 저는 어머니가 젖을 주러 올 때까지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를 보고 "희용이는 어릴 적부터 효자였다"는 말씀을 아내 앞에서 공개적으로 해 주시면서 잠꾸러기 남편을 변호해 주십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제가 아침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것에 대해 바가지를 많이 긁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머니가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런 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린 것이 부모 잘못 만나 젖도 제대로 못 먹어 잘 크지도 못했다고 말입니다. 제가 좀 작은 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은'진짜로 엄마 젖을 조금밖에 못 먹어서 작은가?'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세린이와 태민이는 돌 지날 때까지 엄마 '쭈쭈'를 많이 먹었으니 아마 저보다는 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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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집 앞 텃밭에서 김장 배추가 쑥쑥 잘 크고 있습니다. 대파도 잘 크고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달 전만 해도 폭우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잘 자랄까 싶었는데, 이렇게 잘 자랐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밤낮으로 물을 주면서 배추 속 잘 들으라고 배추들에게 말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냥 저절로 자란 것이 아니구나, 어머니의 정성이 있었구나 하면서 흙은 정직하다는 말을 새삼 떠올립니다.

이슬이 맺혀있는 배추를 한 번 쓰윽 만져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꽉 찼나 하고 배추 속도 들여다봅니다. 그러고는 저도 어머니처럼 배추에게 말했습니다.

'아프지 말고 쑥쑥 잘 커야 한다. 너 아프면 우리 어머니도 아프단다. 알았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린이한테 물어보니 자기가 나올 때부터 없었다고 합니다. 집 모퉁이를 돌아가니 소 외양간에 계신 아버지가 보입니다. 소가 추울까봐 밤새 덮어두었던 천을 거두고 계십니다. 농사일을 소가 다 하던 예전이나, 경운기나 콤바인이 대신하는 요즘이나 시골에서 소는 자식들보다 난 효자이자 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받들어 모시니 말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에 잠을 깼는지 새끼소가 벌떡 일어나 나름대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합니다. 세린이는 "아가소야 잘 있었니?"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어릴 적에는 소가 쳐다보거나 꼬리만 움직여도 무섭다며 도망치거나 울더니, 자주 봐서 그런지 이젠 시골 할머니 집만 오면 음매소를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태민이가 우우~하면서 소를 가리킵니다. 자기도 소가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번쩍 안아 송아지 앞에 얼굴을 들이대니 앙앙 울어댑니다. 무서운가 봅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여 주니 소 한번 쳐다보고, 저 한번 쳐다보면서 눈 동그랗게 뜨고는 뭐라고 종알종알 거립니다. 아마 세린이처럼 "아가 소야 잘 있었니?"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음매소 구경을 하던 세린이가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분명 비닐하우스에 갔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와 아내가 마늘을 까고 있습니다. 순간 아내가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른 새벽에 저렇게 시어머니를 돕는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세린이가 "할머니, 아빠 보세요. 아빠가 사진 찍으면 컴퓨터에 나와요"한다. 어머니는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십니다. 아내가 "신문사에 기사 쓰는 거예요. 저번에도 어머니 마를 까는 거 하고 아버지 외양간에 계신 사진 신문에 나왔어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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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우리 어머니 신문에 나온다고 하자, 그럼 예쁘게 나와야지 하면서 고개를 돌리시더니 웃으십니다. 덕분에 오래 오래 간직할 우리 어머니 예쁘게 웃는 사진 찍었습니다. 글쓰기 전에 예쁜 우리 어머니 사진을 보고 또 봤습니다. 사진 보면서 시골에 가지 않아도 우리 어머니 웃는 예쁜 얼굴 볼 수 있어 좋기도 했고, 하루가 다르게 아픈 곳이 많아지는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손자, 손녀의 웃음소리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나 싶어 들어오신 아버지는 대뜸 "애들 고생하게 뭐하러 새벽부터 마늘 까고 그려"하시면서 어머니한테 한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딴죽걸기에 내공이 쌓이신 어머니는 못 들은 척 마늘만 까십니다.

텃밭 사냥에 나선 아내, 그런 아내가 기특하다는 어머니. 아침에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된장찌개 먹고 설거지를 마친 아내, 어머니한테 바구니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내의 텃밭 사냥이 시작된 것이지요. 배추 속이 아직 차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우선 집 앞에 있는 텃밭에서 배추를 세 포기 뽑습니다. 고추장 찍어 먹으면 맛있는데, 사 먹으려면 돈이 아깝대나 뭐래나?

어머니는 배추를 뽑고 다듬는 아내를 뒤에서 바라보시면서 아내가 기특하다고 하십니다. 올 때마다 저렇게 챙겨가는 모습에 어머니는, 당신이 아직은 자식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흐뭇하시고, 또한 아내가 알뜰살뜰 살림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생각하시는 겁니다.

배추에 이어 파를 뽑으려 하자 어머니가 산 밑 밭에 있는 파가 더 좋다면서 그리로 가라 하십니다. 조금 멀리 있는 탓에 차를 타고 갈까 하다가 세린이와 태민이에게 가을 들녘과 시골길을 걷게 해 주고 싶어 일부러 걸어갔습니다.

아내가 세린이와 함께 파를 뽑습니다. 사진을 찍다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두 모녀의 풍경을 잠시 바라봅니다. 평소에는 큰 소리 칠 일이 많은 아내입니다. 덕분에 울 날도 많은 세린이. 하지만 가을 햇살을 받으면서 저리 정겹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호호, 헤헤 웃음소리가 들리니 흙에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나 봅니다.

"너무 많이 뽑았나? 어머니한테 혼나는 거 아냐?"하면서 파 뽑기를 중단한 아내, 그 아내 옆에 있던 시장바구니 속에는 제가 봐도 너무 많이 뽑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가 꽉 차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한테 "혼나기는, 아마 기특하다고 더 칭찬 받겠네"했습니다.

밭 바로 위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 자리를 잠시 둘러보는데 빨리 오라는 세린이 목소리에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 순간 제 눈에 들어 온 건 저 멀리서 아직 크지도 않은 무를 보면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아내. 금방까지도 파를 많이 뽑았다고 걱정(?)하더니, 이젠 크지도 않은 무까지 욕심의 손길을 뻗칩니다.

가까이 가보니 아직 작습니다. 작아서 맛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안하고 쑥쑥 무를 뽑습니다. 고등어 조림할 때 넣어 먹는다면서 세 개를 뽑더니, 이젠 생채 해먹는다고 두 개, 무국 끓여 먹는다면서 두 개, 친구 나누어 준다면서 세 개, 합쳐서 열개를 뽑습니다.

"으, 저 욕심…" 하면서 아내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세린이가 쑥 하고 무를 뽑습니다. 아주 작은 걸로. 꿀밤을 한 대 주고는 뽑은 자리에 도로 묻어 두었습니다. 그 무 잘 클까요?

산 밑에 있는 밭이라 밤나무가 제법 많습니다. 때가 지나서인지 빈 밤송이만 보입니다. 세린이가 밤 먹고 싶다고 해서 겨우 몇 송이 건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세린이가 다음에 또 오자고 합니다. 어디? 하고 물으니 할머니 집이라고 합니다.

세린이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좋아? 하고 물으니 좋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으니 기특하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음매소도 보고, 흙장난도 하고, 파도 뽑고, 고구마도 캐고, 그리고 할머니가 용돈도 줘서 좋다고 합니다.

세린이 말을 조금 정리해서 말하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으니 좋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정겨움이 있으니 좋고, 이것저것 도시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재미들이 있으니 좋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크면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와 함께 할머니 댁에서 며칠 보내던 이 풍경을 아름답게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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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시골집에서 올 때는 이렇게 항상 차 트렁크가 가득 찹니다. 어머니가 캐 주신 고구마와 처갓집에 주라는 고춧가루, 아내가 뽑은 배추, 파, 무 그리고 장아찌, 된장, 고추장 등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줄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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